2008년 8월 17일 일요일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사람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080817

제목 :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사람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주제 :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보다 그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하나님 앞에서 더 중요하다.
흐름 : 잘사는 사람/잘사는 사람이되기위한 노력/하나님앞에 잘사는 사람/하나님앞에 잘 사는 사람이 되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잘사는 사람
근사한 음식점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때론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들의 모습, 어떻게 보입니까? 중형급 이상의 자동차에서 내려 말쑥한 차림으로 시간을 체크하며 바쁜 걸음으로 주차장을 걸어 나가는 이들의 모습, 어떻게 보입니까? 스타벅스 커피숍에 약간의 서류나 책을 들고 와서 커피를 마시며 뒤적이는 이들의 모습, 어떻게 보이십니까? 백화점에서 고급 의류들을 서슴없이 마음에 드는 대로 카드 결제 하는 이들의 모습, 어떻게 보이십니까?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아이들의 옷이 말쑥한 그런 엄마들의 모습, 어떻게 보이십니까? 이들의 모습 모두가 잘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보이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친분이 있어 보이고, 시간의 여유가 있는 중산층의 사람들로 보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잘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우리의 고정 관념에 이들이야말로 잘사는 사람들이라고 입력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부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잘사는 사람이 되기
그래서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매일 노력합니다. 어린이들은 공부하고 학원에 다니고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웁니다. 왜? 잘살기 위해서입니다. 좋은 학교, 특히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은 사회에 입문할 때에 그 대학의 졸업장이 사회에 진출하는 요술카드와 같기 때문입니다. 특정 대학과 학과를 나온 사람들은 사회에 나갈 때에 말할 수 없는 특혜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최고의 실력을 가졌다고 사회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있다면 그 기회들은 그런 최고의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극렬한 경쟁의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 아주 사악한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과 경쟁하기에 지쳐서 그를 죽이려다 마침내 노예로 팔아버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잠언서 1장에서는 인생의 성공을 위하여 악한 일을 꾀하는 이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0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 11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음부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13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14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찌라도 15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악인들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삶의 욕구들을 채우기 위한 보화를 얻는데 악을 행하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심지어는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악행을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일이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가장 잘 접근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심을 이용할 때입니다. 아무런 욕심이 없던 사람도 다른 사람이 잘 사는 것을 보면 샘이 나고 욕심이 발동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족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그의 삶과 비교할 때 불만을 품고 극심한 경쟁의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그릇된 결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거짓 증언으로 억울하게 하거나, 거짓말을 퍼뜨려서 그를 파멸시키기도 합니다. 잘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다시 말해서 물질적, 사회적으로 가진 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거짓에 둘려 쌓여 살 때가 있습니다. 고기의 저울을 속여 팔거나, 원산지를 속이고, 심지어 썩은 것 까지도 먹거리로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게 갇힌 사람을 풀어주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킵니다. 심지어 자기의 가족들조차도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잘사는 사람, 그래서 가진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악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고 전혀 다른 내용의 삶을 사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없이 우리가 잘 사는 사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소망이 없는 일입니다.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지옥 백성이 되는 일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신앙과 별개로 세상을 살고 있고 그래서 나만을 위하는 나의 욕심만을 채우고자 하는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회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잘 사는 사람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잘사는 사람은 어떻게 사는 사람입니까?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불신앙의 사람들과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살아있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신앙의 사람들과 불신앙의 사람들을 구별하게 할까요?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모시고 사는 것이 불신앙의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리고 그 구별된 모습은 매일 매 순간 나타나지 않고 특별한 때에, 말하자면 신앙인으로서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나타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앙인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면서도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다 같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신앙의 결단을 때때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결정의 대가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시골에 어떤 목사님 한 분이 목회하고 계십니다. 평화롭고 변화가 적은 농촌 마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도 가정이 어려움에 처하였습니다. 가장되는 모 집사가 동네 이장 일을 보면서 동네에 나오는 공금을 유용한 것이 발각되었고 그 돈을 당장 갚지 않으면 형무소에 들어갈 처지였습니다. 아이들은 대학에 다니는 아들과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 둘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농사일을 돕던 순박한 농촌 아낙이었기에 그들에게 닥친 환란은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 목사님께서 동네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대신 빚을 갚아도 갚을 터이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났던 동네 사람들도 그 목사님을 믿고 그 가정을 참아주었습니다. 안 그랬다면 단란했던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를 뻔 하였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도움에 힘입어 그 가족 모두가 열심히 일하여 빚을 갚아갔습니다. 그 목사님도 한 동안 밀린 빚을 갚아가도록 매월 얼마간 도왔습니다.
모두가 나 몰라라 할 때에 그 목사님께서 그들을 돕고자 적극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 그들 가정에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잘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그가 이제까지 살아오던 잘살기 위한 이기적인 몸부림을 다 떨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잘살기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라고 하는 동네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 가셨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그런데 왜 여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요? 그들 중에는 병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병이란 병은 다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퍼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마음에 병들고 자기 죄에 눌린 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뜻 보다는 사람의 생각과 편의대로 신앙생활을 해 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는데...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이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의 집에 가시겠다고 했을 때 삭개오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도 변하고 싶었는데...예수님을 모시고 그 말씀을 듣는다면 정말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 사는 사람으로 변화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신 그의 삶은 그 순간 달라졌습니다. 전에 삭개오는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부를 쌓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8절)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감리교회의 창시자, 위대한 전도자, 요한 웨슬리 목사는 “나는 주머니에 대해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의 말대로라면 삭개오의 물질에 대한 회개는 자신의 전 존재적인 회개를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 살았던 한 사람의 예를 더 들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6.25 한국 전쟁 때에 수원의 한 마을에 미군부대가 왔습니다. 하루는 미군이 무언가 필요하다고 손짓발짓을 했는데, 용케도 한 소년이 그가 나무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논두렁의 말뚝을 뽑아주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그 소년은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가 되어 일했습니다. 그곳에서 일할 때에 칼 파워스 상사를 알게 되었는데 그 상사가 소년을 미국에서 공부시켜주었습니다. 사실 칼 파워스 상사 자신도 가난 때문에 군에 입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한국의 가난한 소년을 미국에 보내어 고등학교 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김장환목사입니다. 그 아들 김요셉은 자신의 책[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든 내 아버지 김장환목사님처럼 될 수 없지만 칼 파워스 상사는 될 수 있다. 마음만 먹는 다면 말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교훈을 가슴깊이 새기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욕구만을 채우려는 이기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기심과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채우는 일이 참 성도의 할 일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4).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사시는 성도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후기도
우리의 전부가 되시는 하나님,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항상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게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용기를 품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T. 02)2693-0525

댓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