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의 예수님
본문: 요한1서 5장 1-12절
목적: 성도들이 예수 안에서 영생의 삶으로 들어간다.
흐름: 사랑/ 순종/ 세상을 이김/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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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삶의 이것저것을 아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참으로 분주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아침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탓에 오피스 아워에 맞춰서 진행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기가 참으로 바빴습니다. 더구나 모임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권을 나눠주기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이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한 주간 어린이들-주로 신강초교 학생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이 저를 이제 신뢰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여름에 아이들을 처음 만난 것인데 한 달 정도를 사탕을 나누어 주면서 ‘교회에 열심히 나가라’, ‘예수님을 믿어라’, ‘겨자씨교회에서 하는 공부방에 와라’ 했었습니다. 그 때에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좀 해 보려고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중단하였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많은 어린이들을 초대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파티에 올래?’ 하는 질문에 대략 20~30명 정도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다음 주에 어린이들을 더 만나면서 얼마나 올 수 있을 지 알아내고, 되도록 많은 어린이들이 오도록 할 계획입니다.
크리스마스 선물, 25일 오후 3시에 열리는 파티를 통해서 담임목사가 얻고자 하는 효과는 첫째, 우리 겨자씨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어린이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유익한 시간을 보냄으로 교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들, 불교나 타종교의 어린이들, 불신의 어린이들 모두를 초청하는 이유는 그 중에 예수 믿기로 작정한 영혼이 우리 교회에 정착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의 어린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동에 대한 보응을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셋째, 25일은 겨울 방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입니다. 어린이들에게 씨앗 도서관을 소개하고 어린이들의 방학생활을 유익하게 이끌어주는 도우미가 되어주고자 함입니다. 이날 오는 어린이들에게 씨앗도서관 운영에 대한 광고를 할 예정입니다.
겨자씨교회의 담임자로서 이승주목사는 우리 교회의 존재 목적이 이웃과 사회에 새힘을 주는 역할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겨자씨의 가진 그 의미, 예수님께서 천국을 겨자씨에 비유하신 그 의미는 결국 겨자씨, 그 작은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어 싹이 나고 자랄 때에 새들의 안식처가 된 것과 같이 남에게 이로움을 끼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 겨자씨교회는 지역주민,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섬기고자 합니다. 이렇게 봉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물질과 동역자를 보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더 이상 성도의 숫자를 가지고 염려하지 않고 교회 살림을 해나가는 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는 것이 우리 겨자씨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 말씀은 나의 예수님이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교회를 떠나갑니다. 더더욱 신학생들은 자신의 짧은 신학적 사고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고 기독교를 떠나가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지난 월요일에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권을 주고 있는데 한 사오십 대의 여자 분이 대뜸 화를 내면서 ‘성탄절은 로마의 태양신을 섬기던 날이었다. 거짓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하였습니다. 그 분이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단편적인 사실입니다. 인터넷이나 메스컴을 통하여 알게된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일이 비일 비재합니다. 이러한 것에 대응하는 기독교의 지혜로운 움직임 또한 요청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기독교를 모해하면서 ‘부끄러운 줄 알라, 당신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할 때에 진정으로 여러분의 속에서 흔들림이 없는가 하는 것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교묘합니다. 여러분의 약점을 노리고 그것을 통하여 여러분의 신앙을 흔들어 놓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은 무엇에 대한 것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해 듣고 확신에 찬 신앙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
“1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거듭남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에는 우리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버지,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많이 올려드려야 하는 데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자녀된 자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요 그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막3:35). 예수 안에서 거듭난 우리가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예수 안에서 형제 자매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아니면 연합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만나는 이들을 사랑으로 섬겼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는 일에 있어서 경쟁자로 느끼고 미워하였습니까? 예수 안에서 형제 자매된 이들, 교우들을 하나님과 같이 예수님과 같이 생각하고 섬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자세가 확립될 때에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순종
“3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것운 것이 아니로다 ”
순종이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들이 사랑을 남에게 나타내고자 함에는 아무래도 그를 기쁘게 하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하겠습니다. 성도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때 저는 이러한 순종이 저 자신의 외로운 투쟁이나, 외로운 고행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예수 믿는 것이 꼭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나 이승주목사가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조건이라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믿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설교할 때에도 아주 고통스러운 일도 감당하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어른도 아니고 어린이들까지 이렇게 어려운 가시밭길을 가야 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자학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인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삶은 형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삶을 뒤 따르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오늘 3절은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대략 세 가지 정도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말씀을 지킬 만한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마음 가운데 함께 하셔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반드시 사랑의 응답이어야 하는데 사랑이 있으면 어떤 의무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어렵거나 힘겨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젊은이가 아이를 업고 매일 그 아이를 등교를 시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등에 업은 아이가 무겁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 젊은이는 말했습니다. “무겁다니요, 이 아이는 제 동생인걸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은 결코 힘들거나 짜증스럽지 않습니다.
여러분, 요즘 들어 괜히 교회에서 하는 일이 짜증이 나고 힘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신앙의 자세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주의 일 하는 것을 기피하고 그 일을 통해서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일까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최선을 다하시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을 이김
“4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세상을 정복하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이러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란 성육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육신을 믿는 다고 함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시고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성육신에 대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배려해 주신다고하는 확신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에 믿음의 능력을 지닌 사람이 됩니다. 첫째,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악영향에 저항할 수 있는 방어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친히 고통당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사단의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악과 대결하여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공격을 견디어내는 힘을 지닙니다. 성육신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을 본 받아 살고자 결단하는 이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또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우연히 그 앞을 지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무고한 해를 당하는 일들이 우리의 삶에는 빈번합니다. 이런 일들을 참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고난은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그가 자기의 삶을 바로 살기 위함이며 어찌되었든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끼치기 위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괴롭힙니다. 욕하고 심하게는 때리기도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숨을 빼앗기도 합니다.
이전의 순교자들,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준 모습은 예수 안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닥쳐오는 모든 고난을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이러한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마시고 담대하게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 성육신을 믿는 믿음은 최후의 승리를 믿는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으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승리자이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
“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기독교인의 생활의 본질은 영생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영원을 소유하고 그 안에 거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생의 삶에 초대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원의 삶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영생에 들어간 사람들은 몇 가지 특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화평을 힘입어 평온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좌절을 극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성함을 힘입어 죄를 극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고뇌와 적의를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 죽음을 극복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불멸하는 생명을 힘입어 불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지난 월요일에 감리교신학대학 동문 노래패, 암하렛츠의 모임에 가서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길게 이야기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거두절미하고 저는 요즘 영생에 들어갔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전에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던 하나님과 사귐과 그 안에서 누리는 평안이 영생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영생의 상태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집을 위하여, 옷을 위하여, 끼니를 위하여 염려하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응당 감당해야 하는 개인적인 책임과 역할들은 열심히 감당하지만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는 독립적 삶을 살기위하여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땀과 노력이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며, 이웃과 사회에 새 힘을 주는 일이라고 믿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생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영생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에 얻게 되는데 이 두 가지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완전하게 계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교후기도
구원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주눅들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모든 적의와 미움은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믿는 자들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8년 12월 21일 일요일
2008년 12월 14일 일요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081214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본문: 마태복음 5장 13-16절
목적: 성도들이 뜨거운 믿음과 강력한 실천의 주인공이 된다.
흐름: 세상 가운데 거하라/선을 행하라/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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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며 날마다 주 안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5장 13-16절의 본문을 가지고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동안 어떻게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경건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이 할 일은 말씀보고 기도하고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큰 은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 가운데 거하라
본문 16절에서 우리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백하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세상과 결별하여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 된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시면서 그 맛을 잃지 않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기독교가 만일 사회를 떠난다면 기독교는 참된 종교로 남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없이는 기독교가 기독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힌 신앙은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비판할 때에 하는 한 가지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성도 간에 교제와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다수가 소수를 배려하지 않을 때에 소수는 고통당하고 심하게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자기들이 속한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할 때에 더더욱 믿지 않는 이들의 상황과 형편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성도의 일상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항상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과 조용히 만나는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일정 기간을 계획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에 힘쓸 수 있는 수련의기회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두고 생각할 때에 온종일 한 평생을 수양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후에는 반드시 세상을 만나러 나가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으로서 온유함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온유함은 하나님께 절대복종하려는 마음이며, 자기에게 닥쳐오는 고난과 고통을 참고 견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온유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유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며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기에 관계할 상대방이 없이는 검증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자기만의 신앙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덕을 끼치기 위하여 세상의 한 가운데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세상을 저버리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신앙을 가지라고 권면하였습니다(고전5:9-11).
우리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 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보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빛이 되며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또 다른 방법은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참된 종교인 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을 통하여 영생을 얻은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생명의 종교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마5:48). 산위의 마을이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마5:14) 예수 안에서 구원하심을 입은 성도들은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분의 거룩한 삶 때문에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할 것이며, 그들 속에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또 한 편으로 세상에게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드러남은 자연스러운 기독교의 본질적 속성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거룩한 예배(liturgy)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그러나 더 넓게는 예배당 안에 예배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행하라고 명령하신 일들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즉 이것은 우리의 영과 육을 아울러 그를 영화롭게 함이며, 정성으로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는 것이며 우리의 직업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며, 먹고 마시는 일이나 팔고 사는 일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고전 10:31) 이것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며, 빈들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항상 친밀함 가운데 거하면서 동시에 세상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왜 선을 행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병이 낫고 예수 믿으면 귀신이 떠나갑니다. 예수 믿으면 배고픔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더 중요하게 주시고자 했던 메시지, 복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뒤엎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선포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왜 선을 행해야 하는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선을 행하지 않고 우리의 정욕을 따라 자신을 만족시키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날이 얼마나 될 런지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기자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불쌍하게 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날이 오기 전에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서기자가 말씀하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a)는 말씀과 한 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선을 행하려고 애쓰고 힘쓰는 일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하는 이유는 이미 선을 행하였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고마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과를 예측하거나, 이미 경험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꼭 기억해야 할 4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 우리 주님은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도우라고 하십니다. 이 일을 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보통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를 기뻐하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관계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심성의 사람인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람을 판단하여 선을 행할 기회를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1:6)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세상의 빛 되고 소금되신 우리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는, 세상적인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에 가능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믿음의 사람들이 선을 행하려 할 때에 극심한 고난이 옵니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신앙을 버리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선을 행하는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고전15:57-58). 선을 행하되 지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행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할 때에 그것이 나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때에 세상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이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가 선행의 기본이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선행은 인간적 노력의 승리가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매달리며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삼년 육 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오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동역자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의 동역자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의 할 일은 선한 마음을 품고 그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더 나아가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겸손히 기도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을 행하고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엡6:10-11).
선을 행할 때에 목표로 삼을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짓 없는 사랑을 품는 일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실함으로 성실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보고 판단할 때에 ‘저 사람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마다 순종하였습니다.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였을 때에도 그는 그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다가 유대관원의 손에 이끌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혼자 애쓰고 힘쓰다가 지쳐 실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꼭 가야 할 길이 이 길입니다. 믿음의 길은 영광만 있는 길도, 고통만 있는 길도 아닙니다. 영광과 고통이 교차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하여 세상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되고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였던 것처럼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 때에 저와 여러분은 ‘아,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구나, 우리 주님이 가라고 하신 좁은 길로 가고 있구나’하시면 됩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신앙적 경건과 사회를 향한 자선 활동으로 세상의 빛이 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 일은 우리가 세상의 가치를 벗어버릴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 눈이 보는 귀하고 좋은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몸의 영양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탐식을 금해야 합니다. 집을 많이 소유하고 좋은 집을 선호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있는 재화를 다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의, 식, 주, 가구 등에 있어서 불필요한 사치성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선물을 가치있게 활용하는 선한 재산 관리인이 되십시오.(벧전4:10). 그리고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막고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십시오. 한 말로 하면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하여 선을 행하고 고난을 참으며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전력하십시오.” 여러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 안에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여러분, 믿는 자들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시는 것은 세상의 연약한 자, 소외된 자들을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도와줘도 고맙다고 답례할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마음과 의심이 있습니다. ‘내가 저들을 도우면 저들이 나에게 완전히 의지하게 되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한 형편이지 누가 알아. 장롱 속에 통장에 감추어둔 돈이 나보다 더 많을지 몰라’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이들과 관계하는 것일 싫어서 그들을 멀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을 돕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학살의 대상이 되는 소수 민족들과 부모가 에이즈로 죽고 자기들도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들이 아프리카에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들을 돕는 착한 한국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 중에 다수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환경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환경이 오염된 피해는 고스란히 온 국민에게 특히 사회의 저소득층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매일 기도할 대에 신월동이 아름다운 고장이 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는데 이유는 지금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이 어떠한 병에 걸리게 될지 알 수 없고 그 어린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위하여서도 관심을 가지고 환경지킴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서부연회에서 보내온 공문을 받았습니다. 북한동포들에게 보내는 내복의 값과 함께 계좌번호가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하면서 북한동포들을 돕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쉽게 도울 길이 열린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올겨울에는 우리 겨자씨교회도 북한동포들을 위하여 내복을 보낼 계획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크리스마티 파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는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 모두를 환영하고,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일들이 사회에 힘을 주는 일인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아직 공개하기 어렵지만, 전도하면서 선을 행할 지혜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하기를 원하고 준비되었습니다. 정기적으로 꾸준히 이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자, 복음이 필요한 자를 만나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어떠한 선을 행할 것인지 깨달으시고 열심히 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후기도
모든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믿는 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 되 게 하옵소서. 어둡고 암울한 이 시기에 이웃과 사회에 새 힘을 주는 교회와 성도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때로 어렵고 힘들어서 낙심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다시 일어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마태복음 5장 13-16절
목적: 성도들이 뜨거운 믿음과 강력한 실천의 주인공이 된다.
흐름: 세상 가운데 거하라/선을 행하라/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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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며 날마다 주 안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5장 13-16절의 본문을 가지고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동안 어떻게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경건의 삶을 살 수 있었는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이 할 일은 말씀보고 기도하고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큰 은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 가운데 거하라
본문 16절에서 우리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백하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세상과 결별하여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 된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시면서 그 맛을 잃지 않도록 당부하셨습니다.
기독교가 만일 사회를 떠난다면 기독교는 참된 종교로 남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없이는 기독교가 기독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힌 신앙은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비판할 때에 하는 한 가지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려 산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성도 간에 교제와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공동체이든지 다수가 소수를 배려하지 않을 때에 소수는 고통당하고 심하게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만약에 성도들이 자기들이 속한 공동체의 다수를 차지할 때에 더더욱 믿지 않는 이들의 상황과 형편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성도의 일상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항상 세상과 떨어져 하나님과 조용히 만나는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일정 기간을 계획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에 힘쓸 수 있는 수련의기회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두고 생각할 때에 온종일 한 평생을 수양만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후에는 반드시 세상을 만나러 나가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으로서 온유함을 가지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온유함은 하나님께 절대복종하려는 마음이며, 자기에게 닥쳐오는 고난과 고통을 참고 견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온유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유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며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기에 관계할 상대방이 없이는 검증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자기만의 신앙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덕을 끼치기 위하여 세상의 한 가운데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세상을 저버리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신앙을 가지라고 권면하였습니다(고전5:9-11).
우리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 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보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세상과 관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 빛이 되며 소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또 다른 방법은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참된 종교인 것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을 통하여 영생을 얻은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생명의 종교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마5:48). 산위의 마을이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마5:14) 예수 안에서 구원하심을 입은 성도들은 세상에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분의 거룩한 삶 때문에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할 것이며, 그들 속에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또 한 편으로 세상에게 그들의 죄를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드러남은 자연스러운 기독교의 본질적 속성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거룩한 예배(liturgy)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그러나 더 넓게는 예배당 안에 예배가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행하라고 명령하신 일들을 실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즉 이것은 우리의 영과 육을 아울러 그를 영화롭게 함이며, 정성으로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는 것이며 우리의 직업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며, 먹고 마시는 일이나 팔고 사는 일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고전 10:31) 이것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며, 빈들에서 홀로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면,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항상 친밀함 가운데 거하면서 동시에 세상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라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왜 선을 행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병이 낫고 예수 믿으면 귀신이 떠나갑니다. 예수 믿으면 배고픔이 해결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확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더 중요하게 주시고자 했던 메시지, 복음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뒤엎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선포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왜 선을 행해야 하는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선을 행하지 않고 우리의 정욕을 따라 자신을 만족시키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날이 얼마나 될 런지 알 수 없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씀합니다. 야고보기자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불쌍하게 되거나 죽음에 이르는 날이 오기 전에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서기자가 말씀하는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12:1a)는 말씀과 한 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선을 행하려고 애쓰고 힘쓰는 일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하는 이유는 이미 선을 행하였지만 사람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고마워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도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과를 예측하거나, 이미 경험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꼭 기억해야 할 4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 우리 주님은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도우라고 하십니다. 이 일을 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보통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를 기뻐하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관계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심성의 사람인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사람을 판단하여 선을 행할 기회를 소멸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11:6) 이러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세상의 빛 되고 소금되신 우리 주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상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는, 세상적인 가치를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에 가능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믿음의 사람들이 선을 행하려 할 때에 극심한 고난이 옵니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때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신앙을 버리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선을 행하는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고전15:57-58). 선을 행하되 지치지 말고,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행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할 때에 그것이 나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때에 세상이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이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가 선행의 기본이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선행은 인간적 노력의 승리가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매달리며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삼년 육 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를 오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동역자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도 하나님의 동역자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역자의 할 일은 선한 마음을 품고 그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더 나아가 그 일의 성취를 위하여 겸손히 기도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선을 행하고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엡6:10-11).
선을 행할 때에 목표로 삼을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짓 없는 사랑을 품는 일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실함으로 성실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보고 판단할 때에 ‘저 사람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령마다 순종하였습니다.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 하였을 때에도 그는 그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선포하다가 유대관원의 손에 이끌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혼자 애쓰고 힘쓰다가 지쳐 실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면 꼭 가야 할 길이 이 길입니다. 믿음의 길은 영광만 있는 길도, 고통만 있는 길도 아닙니다. 영광과 고통이 교차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통하여 세상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 되고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하였던 것처럼 우리를 미워할 것입니다. 그 때에 저와 여러분은 ‘아,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구나, 우리 주님이 가라고 하신 좁은 길로 가고 있구나’하시면 됩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신앙의 선배들을 본 받아 신앙적 경건과 사회를 향한 자선 활동으로 세상의 빛이 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 일은 우리가 세상의 가치를 벗어버릴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 눈이 보는 귀하고 좋은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몸의 영양을 충족시키는 것 이상의 탐식을 금해야 합니다. 집을 많이 소유하고 좋은 집을 선호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있는 재화를 다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의, 식, 주, 가구 등에 있어서 불필요한 사치성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선물을 가치있게 활용하는 선한 재산 관리인이 되십시오.(벧전4:10). 그리고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막고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십시오. 한 말로 하면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하여 선을 행하고 고난을 참으며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전력하십시오.” 여러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 안에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여러분, 믿는 자들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시는 것은 세상의 연약한 자, 소외된 자들을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도와줘도 고맙다고 답례할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위에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두려운 마음과 의심이 있습니다. ‘내가 저들을 도우면 저들이 나에게 완전히 의지하게 되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한 형편이지 누가 알아. 장롱 속에 통장에 감추어둔 돈이 나보다 더 많을지 몰라’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이들과 관계하는 것일 싫어서 그들을 멀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들을 돕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학살의 대상이 되는 소수 민족들과 부모가 에이즈로 죽고 자기들도 에이즈에 걸린 어린이들이 아프리카에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어린이들을 돕는 착한 한국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들 중에 다수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환경의 문제도 심각합니다. 환경이 오염된 피해는 고스란히 온 국민에게 특히 사회의 저소득층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매일 기도할 대에 신월동이 아름다운 고장이 되게 해주실 것을 간구하는데 이유는 지금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어린이들이 어떠한 병에 걸리게 될지 알 수 없고 그 어린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위하여서도 관심을 가지고 환경지킴이가 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 서부연회에서 보내온 공문을 받았습니다. 북한동포들에게 보내는 내복의 값과 함께 계좌번호가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하면서 북한동포들을 돕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쉽게 도울 길이 열린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올겨울에는 우리 겨자씨교회도 북한동포들을 위하여 내복을 보낼 계획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크리스마티 파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는 어린이는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린이들 모두를 환영하고,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일들이 사회에 힘을 주는 일인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아직 공개하기 어렵지만, 전도하면서 선을 행할 지혜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 일을 하기를 원하고 준비되었습니다. 정기적으로 꾸준히 이 일을 행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자, 복음이 필요한 자를 만나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어떠한 선을 행할 것인지 깨달으시고 열심히 행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후기도
모든 순종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 믿는 자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 되 게 하옵소서. 어둡고 암울한 이 시기에 이웃과 사회에 새 힘을 주는 교회와 성도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때로 어렵고 힘들어서 낙심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다시 일어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08년 11월 20일 목요일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가라 081116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가라
본문: 히브리서 11장 1-40절
목적: 성도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산다.
흐름: 믿음 없음의 증거들: 두려움, 불안, 염려, 후회 vs.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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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은 히브리서의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이 들이 어떤 비전을 품으며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였는가를 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임한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달음으로써 우리 겨자씨공동체가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한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방법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정확한 정의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정의하도록 오늘 내놓고 싶은 단어는 “믿음”입니다. 성도들을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데 그 믿음은 어떤 성질의 것입니까?
믿음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믿음은 염려를 물리칩니다.
믿음은 불안을 물리칩니다.
믿음은 후회를 물리칩니다.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두려움, 염려, 불안, 후회에 대한 말씀을 잠시 드리고 싶습니다.
두려움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라는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어두운 길을 갈 때에 두렵습니다. 무엇이 자기 앞에 나타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낮선 길을 갈 때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행동을 보며 자기의 모습을 보며 어떤 반응을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개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게 될 때에 두렵습니다. 그 개가 자제력을 잃고 물어뜯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느꼈던 두려움은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와 이 사회에서 가장 평균적인 삶이 한 가정을 이루고 30대 후반에는 한 명 이상의 자녀를 가지는 것이라면 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저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업난으로 인하여 젊은 층에서 변변한 직장 없이 홀로 지내는 분들이 많이 계신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40대에 초산을 하는 부인들이 많아 졌다는 것은 그 만큼 결혼이 늦어지고 있고 결혼 한 부부들도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을 늦추기 때문입니다. 혼자 남겨지는 것,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은 미래에 어떤 일이 나에게 기다리고 있는가를 모른다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누리는 환경을 잃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존재의 존속 여부를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1분 후에 아니면 10년 후에 언제든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에 이 세상을 떠나갈 존재들인 까닭에 두려워합니다.
불안
우리가 불안하다고 할 때에, 왜 그렇게 느껴집니까? 지금 가진 것을 빼앗길지 모른 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를 떠나갈까 불안합니다. 요즘 같이 부동산 시세가 자꾸만 떨어질 때에는 지금 내가 소유한 재산에 큰 손실을 입게 될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불안합니다. 언제 최고에서 제 2인자의 자리로 밀려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안의 요소는 지금 내게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우리의 성품 때문에 생겨납니다. 두려움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외적인 환경에서 벌어지는 일의 결과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염려
염려는 걱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의 결정을 두고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요리조리 살피지만 확신이 없어 걱정하는 것입니다. 역시 염려함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염려는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하였는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즐겨보던 코미디 프로가 있었는데 MBC 방송국에서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개그맨 이휘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그 선택을 했을 때에 어떤 삶이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짧은 드라마였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는 재미는 두 가지 인생을 모두 경험해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는 단 한 번의 삶의 기회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휘재가 등장한 드라마에서처럼 모든 주어진 선택의 삶을 다 살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자기에게 가져다 줄 영향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 선택하게 되므로 우리는 염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후회
믿음의 삶과 가장 거리가 먼 삶의 유형이 바로 후회하는 삶입니다. 후회의 감정은 언제 찾아옵니까? “내가 일을 망쳤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는 생각들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였더라도 일이 망쳐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이 세계 안에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리 열심히 올바르게 결정하고 행동하였더라도 피해를 입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후회하는 것을 통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후회하는 것을 통해서 배운 점이 있더라도 또 다시 후회하게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삶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을 결정하시고 계획하십니다. 우리도 물론 스스로 우리 삶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계를 통제할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두렴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후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여러분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가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 히브리서 11장은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합니다.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여러분의 삶은 믿음의 삶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자신에게 주지시켰던 생각들이 여전히 여러분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빨리 바뀔지 모르지만 우리의 세포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확인시켜드리면,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말씀에 아무리 크게 감동받았다고 해도 그 행동이 하루아침에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옛 자아와 결별하는 일부터 실행에 옮겨야 하는데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인도하여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려고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의 길에 들어서기 어려워하는 분들의 특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믿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할 때에 생기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믿기보다 먼저 믿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만이 믿음의 열매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세계와 우주의 창조자로 믿는 믿음이 우리의 모든 의문을 풀어주고 우리 삶에 대하여 이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아직 굳은 믿음이 없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출발이 확고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고 하는 결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 무언가 갚진 것을 드리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 되신 것을 인정하는 믿음,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관자이신 것을 고백하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이전에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구약에서 노아를 의로운 자라고 칭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이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에 다른 이들은 박장대소하며 그런 일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동안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일기를 보면서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그것이 그의 의로움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니까?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의 의가 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에 주저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낯선 땅, 아무 의지도 없는 곳으로 그는 순종하여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확실하게 정하여진 일이나 보인 것이 없었으나 그들은 매일의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나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하신 그 모든 일을 신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꿈을 통하여, 아니면 다른 신앙의 사람의 예언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의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눈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어떤 일들을 이루고 어떤 결과를 얻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고 영원한 아버지 집에 들어갈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조금 덜 이루었어도, 이 땅에서 조금 낮아졌어도 슬퍼하지 마시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꿈꾸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자기의 독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의 만년에 얻은 아들이 그의 우상이 되지 않았는지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되 자기의 목숨보다도 더 아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자기의 목숨과 같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허락하신 이삭은 죽은 사람 중에서 돌아온 것과 같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분의 우상이 되도록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사랑하는 자녀들과 부모 형제들이 여러분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모든 문제와 그들과의 관계도 하나님께 맡겨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염려와 근심으로 여러분의 관계나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 아름다운 관계의 문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대에 그들의 삶이 축제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우리 가족의 삶,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복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도 세계를 주름잡는 엘리트민족이 된 이유는 그들이 올바른 신앙교육과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부정적이며 습관적인 실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들의 몸 세포들이 그 실패를 기억하고 ‘다시 그렇게 될거야’, ‘나는 실패할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악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실패는 반복되지 않으며 이전에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는 귀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없을 때에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보시는 것을 기억하고 경거망동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부귀영화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출애굽의 경험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없이는 경험할 수 없는 최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건너야할 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고민을 맡겨드리시기 바랍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길이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고 하는 것을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오히려 우리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과 같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좋은 소리를 듣기보다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 사단이며 악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 까지 우리에게 더 많은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는 세상에 와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는 왕의 잘못을 고하였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결국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본다면 그의 인생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가치로 판단할 때에 세례요한과 같이 고귀한 인생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의 계획을 따라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천국을 선포하며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전도자로 선지자로 사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도 점 보러 다니고, 예수 믿으면서도 부적을 사용해 보기도 하였습니까?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달콤한 행복을 주는 값싼 종교가 아닌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고난이 있고 예수를 믿어도 개인적인 삶에 행복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아주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 후에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말씀되어진 신앙의 선조들과 같이 우리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시고 그것을 위하여 애쓰고 힘쓴 주의 자녀들에게 더욱 아름다운 보상을 준비하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데 그것은 여러분이 흔히 부르짖는 기도의 내용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솔직히 어떤 일이 잘 되어야 제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통찰하시고 통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것은 세상이 선전해 대는 얄팍한 행복의 그림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고 전혀 다른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후기도
오! 능력의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전화 02)2693-0525
본문: 히브리서 11장 1-40절
목적: 성도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산다.
흐름: 믿음 없음의 증거들: 두려움, 불안, 염려, 후회 vs.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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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은 히브리서의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이 들이 어떤 비전을 품으며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였는가를 보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임한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달음으로써 우리 겨자씨공동체가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한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방법도 있지만 반대로 그것이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정확한 정의를 할 수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정의하도록 오늘 내놓고 싶은 단어는 “믿음”입니다. 성도들을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데 그 믿음은 어떤 성질의 것입니까?
믿음은 두려움을 물리칩니다.
믿음은 염려를 물리칩니다.
믿음은 불안을 물리칩니다.
믿음은 후회를 물리칩니다.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두려움, 염려, 불안, 후회에 대한 말씀을 잠시 드리고 싶습니다.
두려움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라는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어두운 길을 갈 때에 두렵습니다. 무엇이 자기 앞에 나타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낮선 길을 갈 때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행동을 보며 자기의 모습을 보며 어떤 반응을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나운 개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게 될 때에 두렵습니다. 그 개가 자제력을 잃고 물어뜯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느꼈던 두려움은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대와 이 사회에서 가장 평균적인 삶이 한 가정을 이루고 30대 후반에는 한 명 이상의 자녀를 가지는 것이라면 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저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취업난으로 인하여 젊은 층에서 변변한 직장 없이 홀로 지내는 분들이 많이 계신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40대에 초산을 하는 부인들이 많아 졌다는 것은 그 만큼 결혼이 늦어지고 있고 결혼 한 부부들도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을 늦추기 때문입니다. 혼자 남겨지는 것,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은 미래에 어떤 일이 나에게 기다리고 있는가를 모른다는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합니다.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누리는 환경을 잃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존재의 존속 여부를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비롯합니다. 1분 후에 아니면 10년 후에 언제든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에 이 세상을 떠나갈 존재들인 까닭에 두려워합니다.
불안
우리가 불안하다고 할 때에, 왜 그렇게 느껴집니까? 지금 가진 것을 빼앗길지 모른 다는 생각이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를 떠나갈까 불안합니다. 요즘 같이 부동산 시세가 자꾸만 떨어질 때에는 지금 내가 소유한 재산에 큰 손실을 입게 될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불안합니다. 언제 최고에서 제 2인자의 자리로 밀려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안의 요소는 지금 내게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우리의 성품 때문에 생겨납니다. 두려움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외적인 환경에서 벌어지는 일의 결과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염려
염려는 걱정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일의 결정을 두고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요리조리 살피지만 확신이 없어 걱정하는 것입니다. 역시 염려함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확실합니다. 염려는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하였는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전에 제가 즐겨보던 코미디 프로가 있었는데 MBC 방송국에서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개그맨 이휘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그 선택을 했을 때에 어떤 삶이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짧은 드라마였습니다. 그 드라마를 보는 재미는 두 가지 인생을 모두 경험해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는 단 한 번의 삶의 기회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휘재가 등장한 드라마에서처럼 모든 주어진 선택의 삶을 다 살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자기에게 가져다 줄 영향에 대하여 알지 못한 채 선택하게 되므로 우리는 염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지 못합니다.
후회
믿음의 삶과 가장 거리가 먼 삶의 유형이 바로 후회하는 삶입니다. 후회의 감정은 언제 찾아옵니까? “내가 일을 망쳤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하는 생각들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였더라도 일이 망쳐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이 세계 안에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아무리 열심히 올바르게 결정하고 행동하였더라도 피해를 입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후회하는 것을 통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후회하는 것을 통해서 배운 점이 있더라도 또 다시 후회하게 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 삶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을 결정하시고 계획하십니다. 우리도 물론 스스로 우리 삶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계를 통제할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두렴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를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후회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여러분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이 가라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 히브리서 11장은 우리에게 해답을 제시합니다.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에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여러분의 삶은 믿음의 삶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자신에게 주지시켰던 생각들이 여전히 여러분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빨리 바뀔지 모르지만 우리의 세포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다른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확인시켜드리면,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말씀에 아무리 크게 감동받았다고 해도 그 행동이 하루아침에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옛 자아와 결별하는 일부터 실행에 옮겨야 하는데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인도하여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려고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의 길에 들어서기 어려워하는 분들의 특징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믿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할 때에 생기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증거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믿기보다 먼저 믿고 하나님을 신뢰할 때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만이 믿음의 열매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세계와 우주의 창조자로 믿는 믿음이 우리의 모든 의문을 풀어주고 우리 삶에 대하여 이해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도 아직 굳은 믿음이 없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출발이 확고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이해하겠다고 하는 결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일을 행하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 무언가 갚진 것을 드리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믿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자 되신 것을 인정하는 믿음,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관자이신 것을 고백하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이전에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구약에서 노아를 의로운 자라고 칭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이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에 다른 이들은 박장대소하며 그런 일이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인내심을 가지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동안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일기를 보면서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그것이 그의 의로움이라고 칭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니까? 끝까지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의 의가 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실 때에 주저하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낯선 땅, 아무 의지도 없는 곳으로 그는 순종하여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확실하게 정하여진 일이나 보인 것이 없었으나 그들은 매일의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진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나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다고 하신 그 모든 일을 신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꿈을 통하여, 아니면 다른 신앙의 사람의 예언을 통하여, 여러분 자신의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눈앞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어떤 일들을 이루고 어떤 결과를 얻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고 영원한 아버지 집에 들어갈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조금 덜 이루었어도, 이 땅에서 조금 낮아졌어도 슬퍼하지 마시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꿈꾸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자기의 독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의 만년에 얻은 아들이 그의 우상이 되지 않았는지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사랑하되 자기의 목숨보다도 더 아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입을 다물고 자기의 목숨과 같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허락하신 이삭은 죽은 사람 중에서 돌아온 것과 같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분의 우상이 되도록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사랑하는 자녀들과 부모 형제들이 여러분의 우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모든 문제와 그들과의 관계도 하나님께 맡겨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염려와 근심으로 여러분의 관계나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에 아름다운 관계의 문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대에 그들의 삶이 축제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 우리 가족의 삶,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복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도 세계를 주름잡는 엘리트민족이 된 이유는 그들이 올바른 신앙교육과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삶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부정적이며 습관적인 실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들의 몸 세포들이 그 실패를 기억하고 ‘다시 그렇게 될거야’, ‘나는 실패할거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악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실패는 반복되지 않으며 이전에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는 귀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없을 때에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보시는 것을 기억하고 경거망동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부귀영화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출애굽의 경험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이 없이는 경험할 수 없는 최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건너야할 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고민을 맡겨드리시기 바랍니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여러분, 믿음의 길이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고 하는 것을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오히려 우리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과 같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좋은 소리를 듣기보다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 사단이며 악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 까지 우리에게 더 많은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는 세상에 와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는 왕의 잘못을 고하였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결국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본다면 그의 인생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의 가치로 판단할 때에 세례요한과 같이 고귀한 인생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의 계획을 따라 엘리사벳과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천국을 선포하며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대한 전도자로 선지자로 사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 믿으면서도 점 보러 다니고, 예수 믿으면서도 부적을 사용해 보기도 하였습니까?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달콤한 행복을 주는 값싼 종교가 아닌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고난이 있고 예수를 믿어도 개인적인 삶에 행복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아주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 후에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서 말씀되어진 신앙의 선조들과 같이 우리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바를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꼭 지키시고 그것을 위하여 애쓰고 힘쓴 주의 자녀들에게 더욱 아름다운 보상을 준비하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거침없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데 그것은 여러분이 흔히 부르짖는 기도의 내용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솔직히 어떤 일이 잘 되어야 제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통찰하시고 통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것은 세상이 선전해 대는 얄팍한 행복의 그림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고 전혀 다른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후기도
오! 능력의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전화 02)2693-0525
2008년 11월 9일 일요일
하나님의 은혜안에 살아가라 081109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라
본문: 디도서 2:11-14
목적: 성도들이 자기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간다.
흐름: 이승주목사의존재하기/친구의방문/친구의죽음/이용규선교사의내려놓는삶/하나님의은혜안에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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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목사의존재하기
삶이 힘들어지고, 그 자신이 삶 속에 쏟아놓는 언어들이 부정적이며 불평의 말이라면 그것은 여러분이 불신앙의 불씨를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예를 들면 버스를 타고 가는 상황이나 누구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장시간 방치될 때 여러분이 습관적으로, 아니면 더 의도적으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그 암송한 말씀을 떠올리며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더욱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는 습관을 여러분이 다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항상 나에게 아주 편안한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제가 하는 두 가지 행동이 있는데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 즉 고민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상황을 도마에 올려두고 고민합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어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간다고 해도 결코 지루할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습관이 여러분에게도 있다면 빨리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서 걱정을 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고민거리도 아닌 것을 고민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머리를 짜내어 고민한다하여도 상황이 바뀌지 않으며 안 될 일이 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습관은 시간표를 짜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앞날을 염려하며 어떻게 하면 보다 보람 있는 삶을 살까를 염려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염려와 탐욕을 물리치고 삶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기 위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서 하셨습니다. “16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려면 영어성경 NLT번역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1 Yes, a person is a fool to store up earthly wealth but not have a rich relationship with God." 사람은 부를 쌓을 줄은 알아도 하나님과의 충족한 관계를 맺지 않는 바보이다. 자기의 육신을 위한 물질을 소유하고 자기의 지위를 높이고 지식을 쌓지만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은 바보일 뿐입니다.
이 말씀이 이승주목사가 계획을 세우는 습관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러한 습관 속에서 저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저는 매일 매 순간 창고 지을 걱정을 하며, 또 그 많은 수확을 누릴 생각을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내 생각만을 앞세우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내 계획만을 나열합니다. 이렇게 계획을 하고 또 계획을 하는 습관은 또한 염려하고 고민하는 습관과 같이 불신앙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계획을 다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계획을 할 때에 항상 하나님께 먼저 물으시기 바랍니다. 습관적인 고민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방법으로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친구의 방문
목요일 아침에 생각지 않았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울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랑하는 친구가 다니러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학교 시절에 아주 발랄하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아주 적극적으로 하고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같은 기독교교육과 친구였지만 기숙사에 들어오면서 더 친해졌고, 사적인 영역에서 만나다 보니 남다른 친구가 되어 학교 졸업한 후에 근 20년이 되는 데도 우리는 여전히 친구입니다. 아마도 평생을 갈 친구이겠지요.
목요일 아침까지도 저는 우울한 상태에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신 것을 믿었지만 나의 삶의 현재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미혼의 상태와 미자립교회의 담임자의 직임을 맡고 있는 이 상황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미리 걱정스러운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상에도 불만이 생겼고 그래서 우울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게 되면 기도도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두 주 정도 이렇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셨듯이 이승주목사를 가끔 위로해 주십니다. 한번은 주일 오후 영어예배를 마치고 언제나와 같이 혼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에 봉사하던 인천 제일 감리 교회의 초등부 어린이 수정이였습니다. 그날이 전도를 위한 “예수사랑축제”일이었는데, 자기는 전도를 못해서 속상했다고 합니다. 그냥 이승주목사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답니다. 나를 기억해주는 어린아이의 전화 한 통화로 하나님께서는 제가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눈물의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저를 위로하신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수원에 계신 고모님을 통하여 위로하셨습니다. 아무리 전화를 하려고 해도-번호를 잘못적어서-전화가 안 되자 다른 고모님께 전화하셔서 저에게 전화하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통화하면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도 대전에 계신 고모부님과 장수교회의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는 저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능히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에는 사랑하는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은 저를 위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정된 일도 아니었는데 친구는 어려운 시간을 내서 기가 죽은 주의 중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함께 대화를 하면서 그 친구의 열심히 사는 이야기에 오히려 제가 불평하던 것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제가 하도 ‘힘들다, 힘들다’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보다 더 힘들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랑스런 사람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추위가 몰려온 때부터 저는 이곳에서의 삶에 불평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더 추운 환경,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친구의 가족을 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어렵고 힘들 때에 더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잘 이겨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십시오. 그중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셔서 당하지 못할 숱한 고난을 당하시며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으로 이루신 일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우는 영광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느 교회의 소식지에 실린 만화를 보니 한 성도에게 돌이 날라와 맞으니 참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엄청나게 많은 돌들이 그 사람을 향해 날라 오는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돌들을 막아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작은 돌이 하나 튀었나보구나 아프지 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난 중에서 예수님을 기억하시고 삶의 고통을 불평하기 전에 우리 주님이 여러분에게 이루신 일이 무엇인가를 묵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의 죽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금요일에는 상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남학생 친구였는데 금요일 새벽 불의의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성결교회의 부목사였던 이 친구는 새벽 예배 후 성도들을 위해 차량운행을 마치고 길을 건너는 중이었답니다. 술에 만취한 운전자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친구를 치고 달아났습니다. 응급실에 옮겨졌지만 혼수상태로 얼마간을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마음씨가 착하고 천사와 같던 친구였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헛된 영광을 구하며 부질없는 물질을 모으며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에 우리는 모두 그 부르심에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데 그들 자신이 한 일을 가지고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장.
"13So think clearly and exercise self-control. Look forward to the special blessing that will come to you at the return of Jesus Christ....17...He will judge or reward you according to what you do." 1Peter 1.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보화를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미련을 두지 말고 하늘을 소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는 미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뜻은 하나님의 뜻 보다 우선하는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되며 그것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용규선교사의 내려놓는삶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사역하다보면 사람의 일만 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이 책, 더 내려놓는 삶, 을 구입한 것은 올해 1월3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책꽃이에 꽃아 둔 채로 11월이 되도록 읽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읽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서론을 읽으면서 복음주의 선교사의 뻔한, Cheezy,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하여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신앙서적을 쓴 저자들의 신앙을 신뢰하지 않는 편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저자들이 자기신앙고백이라고 쓴 글들이 삶이 담겨지지 않은 이야기들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글과 틀에 박힌 복음주의 신앙고백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저를 실망시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내려놓는 삶’은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세계의 많은 신앙인들에게도 읽혀야 할 정도로 솔직하면서 진지한 신앙고백이 담긴 책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습니다. 저자, 이용규선교사의 자기 성찰과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승주목사의 사역에서,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삶에서 무엇이 결핍되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저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감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조차 우리의 생각과 기준 속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고 열어 보이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이용규선교사의 우리의 이러한 모습에 대한 자기 성찰적 지적입니다.
“몽골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의 삶 가운데 동일하게 일하시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우리는 예측 가능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예측 가능한 일들만 추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가 기회를 드리기 보다는 우리의 계획과 경험과 고집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간다. 하나님이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어드리지 않은 채....결국 자신이 신뢰하는 것에 자신이 묶인 채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저를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 되어주시기를 구하지만 실제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의 삶이 그렇게 힘든가? 왜 그렇게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면서 어느 새 다른 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올려놓고 살아가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느새 하나님의 거룩과 성결을 추구하기 보다는 세상 성공에 목을 맨다.”
이 문제는 다른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에게, 주의 부르심을 입은 사역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버렸다고 하고, 내려놓았다고 하다가도 목회라고 하는 사역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주목을 받고, 더 크게는 인기를 얻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성공한 목회와 사역을 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고 사명을 위탁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성숙시키며, 우리와 더 깊이 연합시키기 위해서이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맡은 일의 중요성 여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부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과 무관하게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노력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아버지의 임재하심 안에서 엄청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믿는 대가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영광되게 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요17장). 때로 믿는 우리들의 착각은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없으면 하나님은 이런 저런 일을 못하실거야’하며 거만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니다. 그러나 이용규선교사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과의 사귐을 위해서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맡겨진 사명,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이 실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장.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라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였고 그 은혜로 구원받았고 그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은 염려와 근심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이용규선교사가 그의 삶에서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깨달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천국을 예비하셨고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돌보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행복한”이라는 단어는 세상적인 기준에 의해 정의되어서는 안됩니다. 지위가 높고, 인기가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돈이 많고,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있다는 것이 행복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저와 여러분의 행복의 척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사귐이 있는 그 삶이 행복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어떠한 삶의 목표를 가져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모습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든 죄악 된 일들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도하시고, 또 다시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결의 삶이 어렵다고 하지만 구원을 기쁨이 있으며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며 사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삶의 내용을 제시합니다. 첫째, self-control 자기 절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나는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어’ 그러나 그것은 거짓입니다. 자아의 깊숙한 곳에서 그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절제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절제는 이런 식입니다. 항상 과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수저를 집어들 경우 테이블에 있는 모든 음식을 다 먹어 치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상에 차려진 음식을 어느 정도 다른 곳으로 옮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식사를 시작해도 그 상에 있는 모든 음식을 다 먹고 과식으로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며, 믿음의 사람으로 금주를 실천하고 싶은 주부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술을 마시는 모임에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이전에는 술을 즐기던 사람이었으므로 그 장소에 있게 되면 분명히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완벽하게 자기 절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절제를 위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의 성과를 맛볼 수는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절제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그것을 이기도록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자기 절제의 삶을 실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right conduct 의로운 행동을 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의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E.S. 피오렌자는 Burk Lecture에서 무엇이 옳은 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시대의 정신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한 이유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말씀들이 적용되는 상황마다 저마다의 독특한 처지가 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진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은 정의감에서 불의를 판단하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는 뒤로 하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삶의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하였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사랑의 실천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삶에는 devotion to God,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는 복은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2장
설교후기도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리의 의지대로 행하였던 모든 일들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 되어 주옵소서. 순종하고 낮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디도서 2:11-14
목적: 성도들이 자기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간다.
흐름: 이승주목사의존재하기/친구의방문/친구의죽음/이용규선교사의내려놓는삶/하나님의은혜안에살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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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목사의존재하기
삶이 힘들어지고, 그 자신이 삶 속에 쏟아놓는 언어들이 부정적이며 불평의 말이라면 그것은 여러분이 불신앙의 불씨를 당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십니까? 예를 들면 버스를 타고 가는 상황이나 누구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장시간 방치될 때 여러분이 습관적으로, 아니면 더 의도적으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그 암송한 말씀을 떠올리며 여러분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까 더욱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는 습관을 여러분이 다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항상 나에게 아주 편안한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제가 하는 두 가지 행동이 있는데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 즉 고민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상황을 도마에 올려두고 고민합니다. 이것은 아주 재미있어서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간다고 해도 결코 지루할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습관이 여러분에게도 있다면 빨리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사서 걱정을 한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고민거리도 아닌 것을 고민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머리를 짜내어 고민한다하여도 상황이 바뀌지 않으며 안 될 일이 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습관은 시간표를 짜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앞날을 염려하며 어떻게 하면 보다 보람 있는 삶을 살까를 염려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염려와 탐욕을 물리치고 삶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갖도록 하기 위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부터 21절까지에서 하셨습니다. “16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려면 영어성경 NLT번역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1 Yes, a person is a fool to store up earthly wealth but not have a rich relationship with God." 사람은 부를 쌓을 줄은 알아도 하나님과의 충족한 관계를 맺지 않는 바보이다. 자기의 육신을 위한 물질을 소유하고 자기의 지위를 높이고 지식을 쌓지만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은 바보일 뿐입니다.
이 말씀이 이승주목사가 계획을 세우는 습관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러한 습관 속에서 저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저는 매일 매 순간 창고 지을 걱정을 하며, 또 그 많은 수확을 누릴 생각을 하며 지내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내 생각만을 앞세우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만, 내 계획만을 나열합니다. 이렇게 계획을 하고 또 계획을 하는 습관은 또한 염려하고 고민하는 습관과 같이 불신앙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계획을 다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계획을 할 때에 항상 하나님께 먼저 물으시기 바랍니다. 습관적인 고민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방법으로 우리의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려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친구의 방문
목요일 아침에 생각지 않았던 전화를 받았습니다. 서울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사랑하는 친구가 다니러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학교 시절에 아주 발랄하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아주 적극적으로 하고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같은 기독교교육과 친구였지만 기숙사에 들어오면서 더 친해졌고, 사적인 영역에서 만나다 보니 남다른 친구가 되어 학교 졸업한 후에 근 20년이 되는 데도 우리는 여전히 친구입니다. 아마도 평생을 갈 친구이겠지요.
목요일 아침까지도 저는 우울한 상태에 머물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신 것을 믿었지만 나의 삶의 현재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미혼의 상태와 미자립교회의 담임자의 직임을 맡고 있는 이 상황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미리 걱정스러운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상에도 불만이 생겼고 그래서 우울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게 되면 기도도 안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두 주 정도 이렇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하셨듯이 이승주목사를 가끔 위로해 주십니다. 한번은 주일 오후 영어예배를 마치고 언제나와 같이 혼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에 봉사하던 인천 제일 감리 교회의 초등부 어린이 수정이였습니다. 그날이 전도를 위한 “예수사랑축제”일이었는데, 자기는 전도를 못해서 속상했다고 합니다. 그냥 이승주목사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답니다. 나를 기억해주는 어린아이의 전화 한 통화로 하나님께서는 제가 혼자 예배드리고 혼자 눈물의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저를 위로하신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수원에 계신 고모님을 통하여 위로하셨습니다. 아무리 전화를 하려고 해도-번호를 잘못적어서-전화가 안 되자 다른 고모님께 전화하셔서 저에게 전화하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통화하면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고도 대전에 계신 고모부님과 장수교회의 여러 성도님들의 기도는 저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능히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에는 사랑하는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은 저를 위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정된 일도 아니었는데 친구는 어려운 시간을 내서 기가 죽은 주의 중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함께 대화를 하면서 그 친구의 열심히 사는 이야기에 오히려 제가 불평하던 것들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제가 하도 ‘힘들다, 힘들다’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저보다 더 힘들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랑스런 사람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추위가 몰려온 때부터 저는 이곳에서의 삶에 불평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더 추운 환경,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친구의 가족을 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어렵고 힘들 때에 더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잘 이겨내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십시오. 그중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셔서 당하지 못할 숱한 고난을 당하시며 이겨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으로 이루신 일이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우는 영광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어느 교회의 소식지에 실린 만화를 보니 한 성도에게 돌이 날라와 맞으니 참 아팠습니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엄청나게 많은 돌들이 그 사람을 향해 날라 오는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돌들을 막아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작은 돌이 하나 튀었나보구나 아프지 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난 중에서 예수님을 기억하시고 삶의 고통을 불평하기 전에 우리 주님이 여러분에게 이루신 일이 무엇인가를 묵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친구의 죽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금요일에는 상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신학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남학생 친구였는데 금요일 새벽 불의의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성결교회의 부목사였던 이 친구는 새벽 예배 후 성도들을 위해 차량운행을 마치고 길을 건너는 중이었답니다. 술에 만취한 운전자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 채 친구를 치고 달아났습니다. 응급실에 옮겨졌지만 혼수상태로 얼마간을 있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마음씨가 착하고 천사와 같던 친구였는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헛된 영광을 구하며 부질없는 물질을 모으며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에 우리는 모두 그 부르심에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데 그들 자신이 한 일을 가지고 심판하신다고 합니다.
“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 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벧전 1장.
"13So think clearly and exercise self-control. Look forward to the special blessing that will come to you at the return of Jesus Christ....17...He will judge or reward you according to what you do." 1Peter 1.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보화를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미련을 두지 말고 하늘을 소망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는 미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뜻은 하나님의 뜻 보다 우선하는 그 어떤 것도 우상이 되며 그것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용규선교사의 내려놓는삶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사역하다보면 사람의 일만 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이 책, 더 내려놓는 삶, 을 구입한 것은 올해 1월3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책꽃이에 꽃아 둔 채로 11월이 되도록 읽지 않았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읽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의 서론을 읽으면서 복음주의 선교사의 뻔한, Cheezy,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하여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신앙서적을 쓴 저자들의 신앙을 신뢰하지 않는 편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저자들이 자기신앙고백이라고 쓴 글들이 삶이 담겨지지 않은 이야기들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글과 틀에 박힌 복음주의 신앙고백을 되풀이하는 것으로 저를 실망시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내려놓는 삶’은 영어로도 번역이 되어 세계의 많은 신앙인들에게도 읽혀야 할 정도로 솔직하면서 진지한 신앙고백이 담긴 책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습니다. 저자, 이용규선교사의 자기 성찰과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승주목사의 사역에서,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삶에서 무엇이 결핍되었는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저를 비롯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기대감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조차 우리의 생각과 기준 속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고 열어 보이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이용규선교사의 우리의 이러한 모습에 대한 자기 성찰적 지적입니다.
“몽골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한국의 크리스천들의 삶 가운데 동일하게 일하시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우리는 예측 가능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예측 가능한 일들만 추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우리가 기회를 드리기 보다는 우리의 계획과 경험과 고집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간다. 하나님이 들어오실 자리를 만들어드리지 않은 채....결국 자신이 신뢰하는 것에 자신이 묶인 채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로 저를 비롯한 많은 신앙인들이 아직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 되어주시기를 구하지만 실제로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당신의 삶이 그렇게 힘든가? 왜 그렇게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면서 어느 새 다른 것을 우리의 삶 가운데 올려놓고 살아가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느새 하나님의 거룩과 성결을 추구하기 보다는 세상 성공에 목을 맨다.”
이 문제는 다른 누구보다도 목회자들에게, 주의 부르심을 입은 사역자들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버렸다고 하고, 내려놓았다고 하다가도 목회라고 하는 사역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주목을 받고, 더 크게는 인기를 얻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성공한 목회와 사역을 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해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고 사명을 위탁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성숙시키며, 우리와 더 깊이 연합시키기 위해서이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맡은 일의 중요성 여부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부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과 무관하게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노력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아버지의 임재하심 안에서 엄청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경험하게 된다....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믿는 대가가 아닌 하나님 자신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이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영광되게 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요17장). 때로 믿는 우리들의 착각은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없으면 하나님은 이런 저런 일을 못하실거야’하며 거만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니다. 그러나 이용규선교사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과의 사귐을 위해서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맡겨진 사명,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이 실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18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장.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라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였고 그 은혜로 구원받았고 그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은 염려와 근심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이용규선교사가 그의 삶에서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깨달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천국을 예비하셨고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돌보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행복한”이라는 단어는 세상적인 기준에 의해 정의되어서는 안됩니다. 지위가 높고, 인기가 있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돈이 많고,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있다는 것이 행복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저와 여러분의 행복의 척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다윗과 엘리야와 엘리사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사귐이 있는 그 삶이 행복의 삶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어떠한 삶의 목표를 가져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든 모습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든 죄악 된 일들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도하시고, 또 다시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결의 삶이 어렵다고 하지만 구원을 기쁨이 있으며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며 사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삶의 내용을 제시합니다. 첫째, self-control 자기 절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나는 이 일을 멈출 수가 없어’ 그러나 그것은 거짓입니다. 자아의 깊숙한 곳에서 그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절제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절제는 이런 식입니다. 항상 과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수저를 집어들 경우 테이블에 있는 모든 음식을 다 먹어 치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 상에 차려진 음식을 어느 정도 다른 곳으로 옮겨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식사를 시작해도 그 상에 있는 모든 음식을 다 먹고 과식으로 고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며, 믿음의 사람으로 금주를 실천하고 싶은 주부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술을 마시는 모임에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이전에는 술을 즐기던 사람이었으므로 그 장소에 있게 되면 분명히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완벽하게 자기 절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절제를 위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의 성과를 맛볼 수는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절제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까? 그것을 이기도록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자기 절제의 삶을 실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right conduct 의로운 행동을 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의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의로움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E.S. 피오렌자는 Burk Lecture에서 무엇이 옳은 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시대의 정신에 비추어 판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한 이유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그 말씀들이 적용되는 상황마다 저마다의 독특한 처지가 있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진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은 정의감에서 불의를 판단하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기는 뒤로 하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의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과의 삶의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의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하였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사랑의 실천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삶에는 devotion to God,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는 복은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 임하는 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이미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9...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2장
설교후기도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리의 의지대로 행하였던 모든 일들을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 되어 주옵소서. 순종하고 낮아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2008년 11월 2일 일요일
겨자씨사역의 모델 081102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겨자씨 사역의 모델
본문: 마태복음 4징 23-25절
목적: 성도들이 겨자씨 교회의 사역을 이해하고 동역한다.
흐름: 신월동이야기/ 비전/ 리더십/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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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동이야기
신월동은 경기도와 서울이 만나는 지점에, 서울의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승주목사는 94년 1월부터 오류동에서 1년간 자취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데, 제 기억으로 그때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94년은 제가 부천 소사동에 위치한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과정에 입학한 해입니다. 1년간의 생활 중에 겨울을 두 번 났는데 두해 모두 아주 추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추위를 타는 것은 피부로 느끼는 체감온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정서적 온도도 낮을 때에 느끼는 것이라고 할 때에 너무나 추운 두 번의 겨울이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볼 때에 이승주목사가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여름을 중심으로 한 기간들이었고, 겨울을 중심하여서는 아주 외로운 기억들, 혹독한 삶의 과제들과 싸운 기억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맨체스터의 겨울도, 뉴욕의 겨울도, 서울 냉천동의 겨울도 서로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나빴다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이승주 목사에게 겨울은 힘들고 어려운 계절입니다.
신월동에 이사 와서 여름을 나는데, 저는 이번 여름만큼 땀을 많이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승주목사가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일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건물이 바깥 온도를 차단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건물의 성질은 10월 말부터 추위가 무엇인지 저에게 혹독하게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근 2주 정도를 추운 환경과 싸우는 일에 매여 있습니다.
신월동에서 겨울을 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11월도 안되어서 이렇게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하는 추위와 싸우고 있는데 정작 추위가 시작이 되면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 그 해답을 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목회사역은 제가 이곳 신월동, 겨자씨교회가 위치한 이 건물에서 행복하게, 날마다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함의 신앙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입은 채로 바깥에 나가면 바깥이 더 따듯하게 느껴질 정도인 이러한 집에서 내가 버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승주목사는 행복하게도 그 목회를 뒤에서 후원하시고 기도하시고 함께 오셔서 염려해 주시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님께서 수차례 다녀가시면서 방한을 위한 대책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정말 더 추웠을 텐데 이제는 이길만합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돕는 천사를 엘리야와 예수님께 보내주셨는데 저에게는 부모님이라는 천사를 보내어주셔서 눈물이 나고 힘이 들고 내 스스로 할 수 없을 때에 돕게 하시는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도움을 바라보면서 부모님에게 드리운 사명과 책임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가슴이 아파서 토요일에 많이 울었습니다. 또 그냥 너무 춥고, 아프고, 힘들어서 많이 울었습니다. 사명의 길을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너무 느리게 찾아가는 동생을 매일 매순 간 보며 마음이 힘들고 성질에 맞지 않아서 울었습니다. 이승주 목사가 매주 서야 하는 강단의 현실이 기가 막혀서 울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는 내가 돌보려니와”(시66: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가 비통하여 울 때에, 그가 부끄러워 그의 한탄을 입속으로만 중얼거릴 때에 그의 마음을 위로하셨습니다. 그에게 가장 바라던 자녀를 주심으로 그의 삶속에서의 질고를 제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분량이 하나님에게 자라서 하나님의 복을 충분히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5장.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셨든지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동행하심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비전
“영적 리더의 역할은 하나님을 위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비전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함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도 같은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겨자씨 사역의 비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교회로 서는 것입니다. 첫째 비전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그들의 귀에도 쟁쟁하게 퍼지는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의 엘리트주의를 배격합니다. 설교는 좋게 들리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신랄하게 한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설교가 교양있게 구성되고 설교가 화려한 미사여구를 통하여 전달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받아들이게 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강단이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을 소원합니다.
둘째 비전은 일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면, 예배 안에서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한 그 사안에 대하여 그들이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그것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를 바로 의논하여 행동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겨자씨교회입니다.
셋째, 겨자씨교회는 경제정의를 선도하는 교회공동체를 꿈꿉니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며 함께 기거하는 이방인과 외국인를 홀대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경제정의의 초석이 됩니다. 교회의 예산이 교회를 지탱하는 일에만 사용된다면 그 교회의 존재목적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레이크 우드교회Lakewood Church의 조엘 오스틴 목사 엄청난 액수로 쏟아져들어오는 성도들의 헌금이 들어오는 대로 그들의 교회를 위해서 다 쓰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더 많은 헌금이 들어오면 다른 이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헌금의 얼마가 어디에 쓰이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후에 성도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고 함께 사역의 짐을 나누어 지다보면 교회의 재정을 사용하는 것도 함께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교회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비용을 사용하고 사회에 환원하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에 더욱 많이 사용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겨자씨교회의 주위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쉴 곳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거닐며 뛰어놀 장소가 부족합니다. 이러한 공간을 마련하고 나무를 심으며 공원을 만드는 일도 교회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양질의 도서관을 설립하여 이 지역의 차세대들이 교육의 기회에 더 많이 노출되도록 해야 합니다.
겨자씨교회로 모여드는 성도들이 구름떼와 같을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예비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힘이 생기는 날에는 모두 사회를 위하여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이롭게 하고, 특별히 차세대를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를 심어주기 위한 투자를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가며 하나님의 방식대로 감당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리더십
“양이 없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겁 없이 목회에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승주목사의 철없는 소리였습니다. 이것은 빈교회를 지키는 목회자들을 향하여 했던 말이 아니라 기관 목회자들 중에 양떼가 없는 포지션에 계신 분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조건을 준다고 하여도 “양이 없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라는 말을 내뱉은 것은 경솔한 것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비록 양이 없더라도 그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라면 그는 참된 목사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을 피하여 숨었을 때에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을 주시겠다고 하였을 때에나 그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그 이전에도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증하여 주십니다.
저를 목사라고 부르며 의지하고, 따르며, 말씀을 듣고자 달려 나오는 성도들이 없는 것이 이승주목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고 섬길 양떼를 맡겨주십니까? 이승주목사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맡기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대하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양떼를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지실 때에 거칠고 날까롭고 상처주는 성품이 바뀌어 예수님과같이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적 리더십을 감당할 만한 인격을 길러 내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두 가지 요인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여 신뢰할 때에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더 큰 리더십을 허락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승주목사는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겨자씨교회의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제가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일하도록 이끄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사역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되 항상 채우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이승주목사가 차지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말씀으로 충만할 것을 다짐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그 사역의 현장으로 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리리 지역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 거기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시의 회당은 가르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설교자나 가르치는 자는 항상 정하여지지 않은 채 새로운 인물이 회당장의 허락만으로 강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복음 선포의 최적의 장소를 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들의 예수님을 향한 질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한 질문들에 응답하심으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가증스러운 외식주의자들에게 율법의 진의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신 것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담대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부르기를 원하지 않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의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자들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회개하고 나아오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확실성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전도하실 때에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하시면서 기도로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치유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든 자를 치료하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은 그의 치유의 기적을 통하여 그 사실성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교훈을 남을 돕고 병을 낫게 하는 것으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겨자씨교회의 사역에서도 말씀선포만이 있고 가르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의 섬김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한 마음을 주시기를 지친 영혼들에게 따듯한 건강차 한 잔씩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컵 세트를 구입해 두었는데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이승주목사에게 용기를 더하시고 동역자를 세우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더니 그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주님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주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주님 앞으로 달려 나옵니다.
지금 우리 겨자씨교회는 30명 내외의 성도들이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빈자리만 있는 것입니까?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목회한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소문이 나지 않습니까? 이유는 무언가 감동적인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살아가고, 교회는 교회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기에 소문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승주목사의 기도는 우리 겨자씨교회가 소문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우리 교회에 나타나며 소문이 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생업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소문이 나시기를 바랍니다. 이삭의 농사가 그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고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소문이 나서 그들이 시기하고, 더 좋게는 그들이 부러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렇게 소문난 성도가 많을 때에 자연히 우리 겨자씨교회는 소문이 나게 되고 주를 사모하는 자들이 주 앞에 모여들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랍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역은 말로만 하거나, 입에 발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고 그것이 진리인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전역을 돌아보셨습니다. 자신의 일신상의 일들만을 돌볼 때에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모르기에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위태한 영혼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희생하는 여러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겨자씨교회의 사역의 모델은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모든 사역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 없었고, 심지어 머리 둘 곳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에게 오직 재산이라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영혼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재산이 많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 제가 이러 저러한 사람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금은 힘들고, 더디게 느껴지고, 눈물이 나더라도 힘을 내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후기도
하나님!, 힘들었습니다. 많이 힘들어서 울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조차 들리지 않고 지혜의 말씀도 주시지 않아서 조바심하였습니다. 오! 나의 주여! 주님만을 신뢰하게 하시고 우리 겨자씨교회의 사역이 사람의 기준에 따라 이끌리지 말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마태복음 4징 23-25절
목적: 성도들이 겨자씨 교회의 사역을 이해하고 동역한다.
흐름: 신월동이야기/ 비전/ 리더십/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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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동이야기
신월동은 경기도와 서울이 만나는 지점에, 서울의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승주목사는 94년 1월부터 오류동에서 1년간 자취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데, 제 기억으로 그때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94년은 제가 부천 소사동에 위치한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 과정에 입학한 해입니다. 1년간의 생활 중에 겨울을 두 번 났는데 두해 모두 아주 추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추위를 타는 것은 피부로 느끼는 체감온도 뿐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정서적 온도도 낮을 때에 느끼는 것이라고 할 때에 너무나 추운 두 번의 겨울이었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볼 때에 이승주목사가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은 여름을 중심으로 한 기간들이었고, 겨울을 중심하여서는 아주 외로운 기억들, 혹독한 삶의 과제들과 싸운 기억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맨체스터의 겨울도, 뉴욕의 겨울도, 서울 냉천동의 겨울도 서로 비교해서 어느 쪽이 더 나빴다고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이승주 목사에게 겨울은 힘들고 어려운 계절입니다.
신월동에 이사 와서 여름을 나는데, 저는 이번 여름만큼 땀을 많이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승주목사가 열심히, 아주 열심히 일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건물이 바깥 온도를 차단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건물의 성질은 10월 말부터 추위가 무엇인지 저에게 혹독하게 경험하게 하였습니다. 근 2주 정도를 추운 환경과 싸우는 일에 매여 있습니다.
신월동에서 겨울을 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11월도 안되어서 이렇게 마음까지 움츠러들게 하는 추위와 싸우고 있는데 정작 추위가 시작이 되면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 그 해답을 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목회사역은 제가 이곳 신월동, 겨자씨교회가 위치한 이 건물에서 행복하게, 날마다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감사함의 신앙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입은 채로 바깥에 나가면 바깥이 더 따듯하게 느껴질 정도인 이러한 집에서 내가 버티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승주목사는 행복하게도 그 목회를 뒤에서 후원하시고 기도하시고 함께 오셔서 염려해 주시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님께서 수차례 다녀가시면서 방한을 위한 대책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정말 더 추웠을 텐데 이제는 이길만합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돕는 천사를 엘리야와 예수님께 보내주셨는데 저에게는 부모님이라는 천사를 보내어주셔서 눈물이 나고 힘이 들고 내 스스로 할 수 없을 때에 돕게 하시는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도움을 바라보면서 부모님에게 드리운 사명과 책임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가슴이 아파서 토요일에 많이 울었습니다. 또 그냥 너무 춥고, 아프고, 힘들어서 많이 울었습니다. 사명의 길을 눈먼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너무 느리게 찾아가는 동생을 매일 매순 간 보며 마음이 힘들고 성질에 맞지 않아서 울었습니다. 이승주 목사가 매주 서야 하는 강단의 현실이 기가 막혀서 울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는 내가 돌보려니와”(시66:2)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가 비통하여 울 때에, 그가 부끄러워 그의 한탄을 입속으로만 중얼거릴 때에 그의 마음을 위로하셨습니다. 그에게 가장 바라던 자녀를 주심으로 그의 삶속에서의 질고를 제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좋은 것으로 주시려고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분량이 하나님에게 자라서 하나님의 복을 충분히 받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5장.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경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셨든지 참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동행하심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비전
“영적 리더의 역할은 하나님을 위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비전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함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도 같은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겨자씨 사역의 비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의 교회로 서는 것입니다. 첫째 비전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의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그들의 귀에도 쟁쟁하게 퍼지는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의 엘리트주의를 배격합니다. 설교는 좋게 들리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신랄하게 한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설교가 교양있게 구성되고 설교가 화려한 미사여구를 통하여 전달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받아들이게 하며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강단이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을 소원합니다.
둘째 비전은 일단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면, 예배 안에서 성도들이 “아멘”으로 화답한 그 사안에 대하여 그들이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강단에서 선포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그것을 어떻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를 바로 의논하여 행동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겨자씨교회입니다.
셋째, 겨자씨교회는 경제정의를 선도하는 교회공동체를 꿈꿉니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며 함께 기거하는 이방인과 외국인를 홀대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경제정의의 초석이 됩니다. 교회의 예산이 교회를 지탱하는 일에만 사용된다면 그 교회의 존재목적이 의심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레이크 우드교회Lakewood Church의 조엘 오스틴 목사 엄청난 액수로 쏟아져들어오는 성도들의 헌금이 들어오는 대로 그들의 교회를 위해서 다 쓰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더 많은 헌금이 들어오면 다른 이들을 더 많이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헌금의 얼마가 어디에 쓰이고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후에 성도들이 많이 들어오게 되고 함께 사역의 짐을 나누어 지다보면 교회의 재정을 사용하는 것도 함께 의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교회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비용을 사용하고 사회에 환원하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에 더욱 많이 사용하여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겨자씨교회의 주위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쉴 곳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이 마음 놓고 거닐며 뛰어놀 장소가 부족합니다. 이러한 공간을 마련하고 나무를 심으며 공원을 만드는 일도 교회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양질의 도서관을 설립하여 이 지역의 차세대들이 교육의 기회에 더 많이 노출되도록 해야 합니다.
겨자씨교회로 모여드는 성도들이 구름떼와 같을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렇게 예비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힘이 생기는 날에는 모두 사회를 위하여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이롭게 하고, 특별히 차세대를 올바른 가치관과 태도를 심어주기 위한 투자를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가며 하나님의 방식대로 감당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리더십
“양이 없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겁 없이 목회에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승주목사의 철없는 소리였습니다. 이것은 빈교회를 지키는 목회자들을 향하여 했던 말이 아니라 기관 목회자들 중에 양떼가 없는 포지션에 계신 분들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조건을 준다고 하여도 “양이 없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라는 말을 내뱉은 것은 경솔한 것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비록 양이 없더라도 그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라면 그는 참된 목사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을 피하여 숨었을 때에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명을 주시겠다고 하였을 때에나 그가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한 그 이전에도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목자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증하여 주십니다.
저를 목사라고 부르며 의지하고, 따르며, 말씀을 듣고자 달려 나오는 성도들이 없는 것이 이승주목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떤 방법으로 사랑하고 섬길 양떼를 맡겨주십니까? 이승주목사가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맡기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을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대하고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양떼를 보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 소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지실 때에 거칠고 날까롭고 상처주는 성품이 바뀌어 예수님과같이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적 리더십을 감당할 만한 인격을 길러 내시는데 걸리는 시간은 두 가지 요인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여 신뢰할 때에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더 큰 리더십을 허락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승주목사는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겨자씨교회의 성도들을 이끌어가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제가 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일하도록 이끄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사역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되 항상 채우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이승주목사가 차지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고 말씀으로 충만할 것을 다짐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를 그 사역의 현장으로 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리리 지역을 두루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아가 거기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시의 회당은 가르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설교자나 가르치는 자는 항상 정하여지지 않은 채 새로운 인물이 회당장의 허락만으로 강단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복음 선포의 최적의 장소를 택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들의 예수님을 향한 질문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러한 질문들에 응답하심으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무지를 깨우치시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가증스러운 외식주의자들에게 율법의 진의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원하신 것에 대한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담대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부르기를 원하지 않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의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자들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회개하고 나아오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확실성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신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용기가 필요합니다. 전도하실 때에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하시면서 기도로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치유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든 자를 치료하러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은 그의 치유의 기적을 통하여 그 사실성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교훈을 남을 돕고 병을 낫게 하는 것으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겨자씨교회의 사역에서도 말씀선포만이 있고 가르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의 섬김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한 마음을 주시기를 지친 영혼들에게 따듯한 건강차 한 잔씩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컵 세트를 구입해 두었는데 아직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이승주목사에게 용기를 더하시고 동역자를 세우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더니 그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주님 앞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삶의 어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주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주님 앞으로 달려 나옵니다.
지금 우리 겨자씨교회는 30명 내외의 성도들이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해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빈자리만 있는 것입니까?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목회한다는 소문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소문이 나지 않습니까? 이유는 무언가 감동적인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살아가고, 교회는 교회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기에 소문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승주목사의 기도는 우리 겨자씨교회가 소문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우리 교회에 나타나며 소문이 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생업이 무엇이든 그것으로 소문이 나시기를 바랍니다. 이삭의 농사가 그랄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고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 소문이 나서 그들이 시기하고, 더 좋게는 그들이 부러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렇게 소문난 성도가 많을 때에 자연히 우리 겨자씨교회는 소문이 나게 되고 주를 사모하는 자들이 주 앞에 모여들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랍니다.
우리 예수님의 사역은 말로만 하거나, 입에 발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고 그것이 진리인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전역을 돌아보셨습니다. 자신의 일신상의 일들만을 돌볼 때에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모르기에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위태한 영혼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희생하는 여러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겨자씨교회의 사역의 모델은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모든 사역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 없었고, 심지어 머리 둘 곳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에게 오직 재산이라면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영혼들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재산이 많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 제가 이러 저러한 사람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금은 힘들고, 더디게 느껴지고, 눈물이 나더라도 힘을 내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후기도
하나님!, 힘들었습니다. 많이 힘들어서 울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조차 들리지 않고 지혜의 말씀도 주시지 않아서 조바심하였습니다. 오! 나의 주여! 주님만을 신뢰하게 하시고 우리 겨자씨교회의 사역이 사람의 기준에 따라 이끌리지 말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2층
전화 02)2693-0525
2008년 10월 27일 월요일
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 081026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
본문: 누가복음 22장 39-46절 열왕기상19장 1-19절
목적: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신들을 향하신 뜻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흐름: 엘리야의부르짖음/세례요한이갇히다/예수님의 기도/사도바울의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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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을 살아온 것이 우리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는 기쁨으로 충만하신 분들만 하나님께 손을 높이 들어 박수하시며 영광 돌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지난 토요일에는 한가지 소식을 접하고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부모 없이 홀로 국경을 넘은 다섯 살배기 탈북 아이가 한국에 온 지 2년 만에 탈북자 지위를 인정받게 됐다. 아이의 어머니는 함께 탈북을 하다 중국 공안당국에 적발돼 어머니만 다시 북송되는 눈물의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이경구 부장판사)는 24일 탈북 소년 황모군(5)이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낸 북한이탈주민인정거부처분취소소송에서 "국가는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온갖 위기를 넘기며 한국에 도착한 뒤에도 출생지가 중국이라는 이유로 탈북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황군은 이번 판결로 보금자리를 갖게 됐다.
황군의 어머니 김모씨(37)는 2002년 생활고 때문에 탈북해 중국에서 황군을 낳았다. 당시 동거 중이었던 중국 남성은 모자를 거리로 내쳤다. 결국 황군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와 함께 강제북송됐고 두 달여간 수용소에서 지냈다. 출소한 뒤 2004년 3월 황군의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다시 탈북했다.
이후 황군의 어머니는 2006년 3월 배를 타고 아들과 한국으로 향하던 중 중국공안에게 발각됐다. 황군만은 지키고 싶었던 어머니는 공안에게 "이 아이는 동거하던 중국인의 아들"이라고 거짓 주장하며 중국에서 살고 있던 친척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두고 혼자 북송당했다.
이후 황군은 중국에 있는 어머니의 지인 손에 맡겨졌지만 주차장에 버려지는 등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러다 먼저 탈북에 성공한 황군의 이모들은 수소문 끝에 아이를 찾아냈고, 황군을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황군은 중국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가슴에 지닌 채 소수의 탈북자들 틈에 끼어 2006년 8월 중국에서 몽골을 거쳐 간신히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부는 "황군은 어머니 김씨가 중국 남성과 동거하던 중 낳은 아이이므로 북한 이탈주민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군이 지니고 있던 쪽지에 아버지가 중국 남성으로 표기된 것도 거부 이유가 됐다. 이 때문에 황군은 한국 내 이모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무적자 신분이 돼 유치원에도 못 가고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재판부는 "황군은 김씨가 북한의 남편 황씨와의 법적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 태어나 민법상 황씨의 아들이라는 점이 인정되고 아버지를 중국인으로 적은 것도 강제북송을 면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며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의 동포들이 당하고 살아야할 모진 고통이 저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고, 아이의 눈빛이 아른 거리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랄 나이에 이미 어른도 견디어 내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양천지방 어린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잘 꾸며진 무대 웨에서 찬양대회를 하는데, 저 북녘의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호화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릅니다. 탈북민들에게 주는 국가의 혜택을 받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고 그 아이가 자라서 이 민족을 위하여, 특히 북녘의 동포들을 위하여 더 많이 쓰임받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뇌리를 스치는 것은 탈북민들에게 주는 혜택을 노숙자들에게는 주지 않는가 하는 의문점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버려진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돌보는 노력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국가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또는 교회가 돌보는 가를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며, 부당하게 그 혜택이 그들을 빗겨간다면 오늘 이 기사에서 보았던 5세의 어린이와 같이 다시 검토하도록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빌립보서 1장 18절의 말씀에 의지하여 행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 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라는 자성적 질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을 자처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은 풍요의 신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풍요를 주시기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바른 인간관계를 먼저 맺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엘리야와 세례요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경우를 짚어가면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숨겨진 뜻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부르짖음
엘리야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비로 받아들인 아합의 통치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자입니다. 당시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에 그 패역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게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마리아에 바알의 사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의 수만 850명이나 되었습니다(왕상17장, 18장).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가뭄을 내리실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또 3년 후에 갈멜산에서 이방신의 선지자들 850명과 대결하여 하나님만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이방의 선지자들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름으로 인하여 가뭄이 해갈되는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아합 왕에게 엘리야가 보여준 이적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왕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믿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아합왕의 옆에는 그를 패역한 자로 만드는 왕비,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엘리야를 향한 독설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배림이 마땅하니라” (왕상19:2)
너무나 확실하게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지만 불신의 이세벨에게는 그의 행한 일이 되갚아 주어야 할 망령된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하였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어떤 때는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었는데, 단 한 사람, 이세벨 왕비로 인하여 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9장 4절과 같이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일의 되어진 결과에 따라 자기의 영광을 취하고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선포하고 이룬 일들로 인하여,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권력자로부터 미움을 받고, 그래서 백성들도 덩달아 그를 멸시하는 그 상황을 견디어 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가 한탄하며 그의 목숨을 거두실 것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나의 응답은 아주 즉각적인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아래 잠들어 누운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위로하게 하셨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여 다시 사십 주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또 거기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새로운 시대의 인물들에게 기름 부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아람 왕으로 하사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후를,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대신하는 사명을 주기 위하여 기름 붓게 하셨습니다.(왕상19장) 그 일의 목적은 왕상 19장 17절 이하에서 드러납니다.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사야의 불평이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며 그가 속한 그 땅에서 자기가 당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으로 인한 화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평하는 입이 그 소리를 멈출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어려워서, ‘하나님 저를 천국으로 지금 데려가십시오’ 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여러분이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중보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중보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로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이 갇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엘리사벳에게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은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 역시 예수님의 탄생 때와 같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사야 40장 3절을 인용하면서 요한을 메시아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미리 보내신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태3:3)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천국의 도래를 알리는 회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강력한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자기에게 세례 받기 위해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똑바로 살아라’하는 독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끝내 죽임을 당한 것은 그의 복음 선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것을 주장하였는데, 헤롯왕이 수치스럽게도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이 옳지 않다고 직언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은 헤롯왕 뿐 아니라 헤로디아에게도 싫은 소리였기에 결국 옥에 갇히고 마침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그는 스스로도 자기는 이 세상의 빛으로 온 사람이 아니고 그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였을 때에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이아니라 냄새나고 수치로 들끓는 감옥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갔고 조용히 마쳤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그의 이름도 증거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매일 축제이고, 매일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생활을 너무 행복과 연관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즐겁고 영광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하여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무거운 사명, 더 중요한 사명을 맡기시는데,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매일 행복을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일을 예로 든다면, 아버지와 남편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즐겁습니까?” 그 때 어떤 사람의 대답은 “예, 저는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은 전혀 감당하지 않은 채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여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대답은 “매일 즐겁고, 매일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내 삶에는 보람이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이 그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어 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그들을 사랑하기에 보람있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이 육체적으로 고단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시댁과 친정에도 자주 찾아뵙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에 마음과 육체가 모두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때에 저와 여러분은 감당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힘이 된다고 할 때에 고난도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동방박사로부터 탄생을 축하하는 경배를 받으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평범한 삶을 30년간 사셨습니다. “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2장. 나사렛이라는 시골마을에서 자라시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죄로 인해 삶이 불안한 사람들을 경험하셨습니다. 평범한 유대의 소년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평범한 시간들을 비범하게 보내신 것입니다. 나중에 갈릴리 회당과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에도 그의 지혜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오늘 기도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셨는데, 사람들은 그를 믿으려하지 않고 요한복음에 보면 그를 괴롭히는 질문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너무나 차가운 불신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행하는 그 행함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요14:11). 이렇게 사람들의 불신의 벽은 높았고 그를 따르는 대중도 한 순간에 환란이 오면 그를 떠나갈 터였습니다.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호흡이 필요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기도를 돕기 위하여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올 정도였습니다(43절). 성경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44절)”고 기록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양천지방여선교회주최로 ‘이웃 사랑 나눔 예술제’를 열었는데 그날 초대된 게스트가 수화로 뮤지컬을 하는 단체였습니다. 공연은 두 가지로 진행되었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다룬 ‘마리아, 마리아’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생애를 그린 ‘Jesus, Jesus' 가 공연되었습니다. ‘Jesus, Jesus’의 장면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그에게 애걸하기를 왜 당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이적을 행하시지 않고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항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심경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군대마귀를 내쫒으시던 예수님의 능력으로 능히 세상의 권력, 로마의 권력도 이기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이 모진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큰 사랑의 역사는 인간적인, 가벼운,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정의가 그 안에 바로 세워지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기 위하여 정확한 규칙을 정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였을 때에 드는 사랑의 매와도 같은 정의를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네가 용서 받았노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친히 능욕을 당하시고 고통당하신 것입니다. 죽으시기 까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희생하신 예수님 앞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왜 내 부동산이 손해를 보고, 왜 내 자녀가 해를 당하고, 왜 내 배우자가 한눈을 팔고,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가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까? 그런 모든 생활의 일들은 작은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그 모든 왜곡된 관계는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특히 여러분의 재산의 문제로 고통당할 때에,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신의 모습, 자신의 물질을 사용하고 소유하는 그 방식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돌아보며 아닐 때에는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마음에 감동으로 주시는 생각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실 때에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명심할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광만을 추구할 때에 여러분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멀어진 사람은 한 두 번은 하나님의 복 주심을 체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의 고난의 깊이를 묵상하시고 세상을 향하여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찾으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대답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변명-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신봉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그 때도 사도가 되기 전의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던 중 이었습니다-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운 좋은 사람보다 억 만 배나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의 말씀을 들었으므로 자기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예수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같이 그는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셨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자기의 갇힌 것이 복음전파를 위하여 도움이 되었다면서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빌1:12-13). 이것은 감옥에 갇히는 일이 복음전파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어느 상황에 처하든지 감사하기를 배운 자의 반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감사하고 그 곳에서 자기가 꼭 해야 할 일들을 찾아 성실히 일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었던 그 교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내 것을 모아두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그 사랑을 믿는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 곳은 어디입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성장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앞을 내다보고 좋은 계획을 세우려 해도 좋은 전망이 없습니까? 이 일을 여러분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선 곳에 임재하십니다. 천사를 통해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먹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통스럽고 외로원 기도의 자리에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아멘.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우리의 선 자리, 나의 현재를 부정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뜻하셔서 보내시고 세워주신 자리에서 더욱 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난도 이기게 하옵소서.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소원하게 하시고 깨달은 바를 이루어드리는 아름다운 주의 자녀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누가복음 22장 39-46절 열왕기상19장 1-19절
목적: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신들을 향하신 뜻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흐름: 엘리야의부르짖음/세례요한이갇히다/예수님의 기도/사도바울의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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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을 살아온 것이 우리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는 기쁨으로 충만하신 분들만 하나님께 손을 높이 들어 박수하시며 영광 돌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지난 토요일에는 한가지 소식을 접하고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부모 없이 홀로 국경을 넘은 다섯 살배기 탈북 아이가 한국에 온 지 2년 만에 탈북자 지위를 인정받게 됐다. 아이의 어머니는 함께 탈북을 하다 중국 공안당국에 적발돼 어머니만 다시 북송되는 눈물의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이경구 부장판사)는 24일 탈북 소년 황모군(5)이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낸 북한이탈주민인정거부처분취소소송에서 "국가는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온갖 위기를 넘기며 한국에 도착한 뒤에도 출생지가 중국이라는 이유로 탈북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황군은 이번 판결로 보금자리를 갖게 됐다.
황군의 어머니 김모씨(37)는 2002년 생활고 때문에 탈북해 중국에서 황군을 낳았다. 당시 동거 중이었던 중국 남성은 모자를 거리로 내쳤다. 결국 황군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와 함께 강제북송됐고 두 달여간 수용소에서 지냈다. 출소한 뒤 2004년 3월 황군의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다시 탈북했다.
이후 황군의 어머니는 2006년 3월 배를 타고 아들과 한국으로 향하던 중 중국공안에게 발각됐다. 황군만은 지키고 싶었던 어머니는 공안에게 "이 아이는 동거하던 중국인의 아들"이라고 거짓 주장하며 중국에서 살고 있던 친척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두고 혼자 북송당했다.
이후 황군은 중국에 있는 어머니의 지인 손에 맡겨졌지만 주차장에 버려지는 등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러다 먼저 탈북에 성공한 황군의 이모들은 수소문 끝에 아이를 찾아냈고, 황군을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황군은 중국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가슴에 지닌 채 소수의 탈북자들 틈에 끼어 2006년 8월 중국에서 몽골을 거쳐 간신히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부는 "황군은 어머니 김씨가 중국 남성과 동거하던 중 낳은 아이이므로 북한 이탈주민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군이 지니고 있던 쪽지에 아버지가 중국 남성으로 표기된 것도 거부 이유가 됐다. 이 때문에 황군은 한국 내 이모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무적자 신분이 돼 유치원에도 못 가고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재판부는 "황군은 김씨가 북한의 남편 황씨와의 법적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 태어나 민법상 황씨의 아들이라는 점이 인정되고 아버지를 중국인으로 적은 것도 강제북송을 면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며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의 동포들이 당하고 살아야할 모진 고통이 저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고, 아이의 눈빛이 아른 거리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랄 나이에 이미 어른도 견디어 내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양천지방 어린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잘 꾸며진 무대 웨에서 찬양대회를 하는데, 저 북녘의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호화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릅니다. 탈북민들에게 주는 국가의 혜택을 받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고 그 아이가 자라서 이 민족을 위하여, 특히 북녘의 동포들을 위하여 더 많이 쓰임받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뇌리를 스치는 것은 탈북민들에게 주는 혜택을 노숙자들에게는 주지 않는가 하는 의문점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버려진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돌보는 노력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국가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또는 교회가 돌보는 가를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며, 부당하게 그 혜택이 그들을 빗겨간다면 오늘 이 기사에서 보았던 5세의 어린이와 같이 다시 검토하도록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빌립보서 1장 18절의 말씀에 의지하여 행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 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라는 자성적 질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을 자처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은 풍요의 신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풍요를 주시기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바른 인간관계를 먼저 맺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엘리야와 세례요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경우를 짚어가면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숨겨진 뜻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부르짖음
엘리야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비로 받아들인 아합의 통치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자입니다. 당시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에 그 패역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게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마리아에 바알의 사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의 수만 850명이나 되었습니다(왕상17장, 18장).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가뭄을 내리실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또 3년 후에 갈멜산에서 이방신의 선지자들 850명과 대결하여 하나님만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이방의 선지자들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름으로 인하여 가뭄이 해갈되는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아합 왕에게 엘리야가 보여준 이적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왕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믿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아합왕의 옆에는 그를 패역한 자로 만드는 왕비,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엘리야를 향한 독설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배림이 마땅하니라” (왕상19:2)
너무나 확실하게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지만 불신의 이세벨에게는 그의 행한 일이 되갚아 주어야 할 망령된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하였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어떤 때는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었는데, 단 한 사람, 이세벨 왕비로 인하여 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9장 4절과 같이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일의 되어진 결과에 따라 자기의 영광을 취하고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선포하고 이룬 일들로 인하여,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권력자로부터 미움을 받고, 그래서 백성들도 덩달아 그를 멸시하는 그 상황을 견디어 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가 한탄하며 그의 목숨을 거두실 것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나의 응답은 아주 즉각적인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아래 잠들어 누운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위로하게 하셨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여 다시 사십 주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또 거기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새로운 시대의 인물들에게 기름 부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아람 왕으로 하사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후를,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대신하는 사명을 주기 위하여 기름 붓게 하셨습니다.(왕상19장) 그 일의 목적은 왕상 19장 17절 이하에서 드러납니다.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사야의 불평이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며 그가 속한 그 땅에서 자기가 당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으로 인한 화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평하는 입이 그 소리를 멈출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어려워서, ‘하나님 저를 천국으로 지금 데려가십시오’ 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여러분이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중보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중보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로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이 갇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엘리사벳에게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은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 역시 예수님의 탄생 때와 같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사야 40장 3절을 인용하면서 요한을 메시아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미리 보내신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태3:3)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천국의 도래를 알리는 회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강력한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자기에게 세례 받기 위해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똑바로 살아라’하는 독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끝내 죽임을 당한 것은 그의 복음 선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것을 주장하였는데, 헤롯왕이 수치스럽게도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이 옳지 않다고 직언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은 헤롯왕 뿐 아니라 헤로디아에게도 싫은 소리였기에 결국 옥에 갇히고 마침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그는 스스로도 자기는 이 세상의 빛으로 온 사람이 아니고 그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였을 때에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이아니라 냄새나고 수치로 들끓는 감옥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갔고 조용히 마쳤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그의 이름도 증거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매일 축제이고, 매일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생활을 너무 행복과 연관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즐겁고 영광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하여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무거운 사명, 더 중요한 사명을 맡기시는데,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매일 행복을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일을 예로 든다면, 아버지와 남편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즐겁습니까?” 그 때 어떤 사람의 대답은 “예, 저는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은 전혀 감당하지 않은 채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여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대답은 “매일 즐겁고, 매일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내 삶에는 보람이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이 그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어 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그들을 사랑하기에 보람있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이 육체적으로 고단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시댁과 친정에도 자주 찾아뵙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에 마음과 육체가 모두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때에 저와 여러분은 감당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힘이 된다고 할 때에 고난도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동방박사로부터 탄생을 축하하는 경배를 받으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평범한 삶을 30년간 사셨습니다. “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2장. 나사렛이라는 시골마을에서 자라시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죄로 인해 삶이 불안한 사람들을 경험하셨습니다. 평범한 유대의 소년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평범한 시간들을 비범하게 보내신 것입니다. 나중에 갈릴리 회당과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에도 그의 지혜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오늘 기도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셨는데, 사람들은 그를 믿으려하지 않고 요한복음에 보면 그를 괴롭히는 질문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너무나 차가운 불신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행하는 그 행함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요14:11). 이렇게 사람들의 불신의 벽은 높았고 그를 따르는 대중도 한 순간에 환란이 오면 그를 떠나갈 터였습니다.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호흡이 필요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기도를 돕기 위하여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올 정도였습니다(43절). 성경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44절)”고 기록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양천지방여선교회주최로 ‘이웃 사랑 나눔 예술제’를 열었는데 그날 초대된 게스트가 수화로 뮤지컬을 하는 단체였습니다. 공연은 두 가지로 진행되었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다룬 ‘마리아, 마리아’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생애를 그린 ‘Jesus, Jesus' 가 공연되었습니다. ‘Jesus, Jesus’의 장면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그에게 애걸하기를 왜 당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이적을 행하시지 않고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항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심경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군대마귀를 내쫒으시던 예수님의 능력으로 능히 세상의 권력, 로마의 권력도 이기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이 모진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큰 사랑의 역사는 인간적인, 가벼운,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정의가 그 안에 바로 세워지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기 위하여 정확한 규칙을 정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였을 때에 드는 사랑의 매와도 같은 정의를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네가 용서 받았노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친히 능욕을 당하시고 고통당하신 것입니다. 죽으시기 까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희생하신 예수님 앞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왜 내 부동산이 손해를 보고, 왜 내 자녀가 해를 당하고, 왜 내 배우자가 한눈을 팔고,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가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까? 그런 모든 생활의 일들은 작은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그 모든 왜곡된 관계는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특히 여러분의 재산의 문제로 고통당할 때에,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신의 모습, 자신의 물질을 사용하고 소유하는 그 방식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돌아보며 아닐 때에는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마음에 감동으로 주시는 생각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실 때에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명심할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광만을 추구할 때에 여러분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멀어진 사람은 한 두 번은 하나님의 복 주심을 체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의 고난의 깊이를 묵상하시고 세상을 향하여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찾으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대답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변명-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신봉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그 때도 사도가 되기 전의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던 중 이었습니다-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운 좋은 사람보다 억 만 배나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의 말씀을 들었으므로 자기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예수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같이 그는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셨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자기의 갇힌 것이 복음전파를 위하여 도움이 되었다면서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빌1:12-13). 이것은 감옥에 갇히는 일이 복음전파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어느 상황에 처하든지 감사하기를 배운 자의 반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감사하고 그 곳에서 자기가 꼭 해야 할 일들을 찾아 성실히 일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었던 그 교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내 것을 모아두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그 사랑을 믿는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 곳은 어디입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성장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앞을 내다보고 좋은 계획을 세우려 해도 좋은 전망이 없습니까? 이 일을 여러분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선 곳에 임재하십니다. 천사를 통해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먹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통스럽고 외로원 기도의 자리에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아멘.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우리의 선 자리, 나의 현재를 부정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뜻하셔서 보내시고 세워주신 자리에서 더욱 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난도 이기게 하옵소서.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소원하게 하시고 깨달은 바를 이루어드리는 아름다운 주의 자녀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나를 따르라 081019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나를 따르라
본문: 요12:23-26
목적: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뒤따른다.
흐름: 부귀를 따르는 삶/쾌락을 따르는 삶/정의를 따르는 삶/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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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박수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부귀를 따르는 삶
사람들은 흔히 부를 추구하고 그 부를 통하여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아주 놀랄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선출될 가능성이 수치상으로 높은 것을 우리가 뉴스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선거운동 초기에는 공화당후보인 맥케인 후보가 민주당 후보 오바마를 지지도에서 앞서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업체가 운영난으로 파산하게 되면서 미국과 세계의 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실패로 경기가 둔화되고 고용이 줄며, 모기지 이자율이 치솟는 등 미국경제에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국과 세계경제의 원리가 되었던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뒤를 잇는 주자로 보이는 맥케인 후보는 지금 모든 미 국민이 보는 앞에서 실패자가 된 부시 대통령의 분신 외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정책면에서도 오바마 후보의 정책이 경제를 일으키고 힘없고 돈 없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나마 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명분보다는 자신들의 실리 면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경제에 실패할 것 같은 맥케인 후보 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열 것으로 보이는 오바마후보를 더 지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측면들은 생략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의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중에 시드니 화이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속에는 다양한 괴짜 캐릭터들이 있는데 그 중에 테런스라는 졸업생이 있습니다. 그는 그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자기만의 연구를 위해 학교에 몇 년간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색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함께 지내는 룸메이트조차 그가 관심하며 연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그가 박수를 받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순간이 있습니다. 말쑥한 차림을 한 테런스가 멋진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데 한 눈에 보기에도 그에게 엄청난 변화가 있는 듯했습니다. 룸메이트들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테런스는 자기의 연구하던 예측이론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의아한 눈길을 보냅니다. 그제야 테런스가 자기의 예측이론을 한 인터넷 회사에 10만 달러에 팔았다고 이야기하니 룸메이트들이 신이 나서 축하를 하고 부러워합니다. 이것은 이 영화의 주된 장면이 아닌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덧붙여진 것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충분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루었다고 할 때에 물질은 그것을 말해주는 척도가 됩니다. 흔히 하는 우스갯말로 티코를 가지고 고급 호텔에 진입하려 했으나 자꾸만 밖으로 돌리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음식점엘 가더라도 좋은 차를 가지고 가면 더 대접이 좋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돈의 적고 많음에 따라서 좋은 대우를 받거나 아니면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고 느끼기에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을 따르는 삶이 좋다고 하고 한 번 그것을 위해 살아봅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열심히 일하여 아주 많은 물질을 벌어들입니다. 때로는 사기꾼도 만나고 때로는 스스로 우매하여서 실패하기도 하지만 물질을 벌어들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자가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처럼 생각하고 부자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듣자하니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돈을 쓰기 전에 일 곱 번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돈을 쓸 일이 줄어들어 자기 가진 것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부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비는 줄여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마트에 갔는데 필요한 목록을 적어간 것 외에 아주 싸게 파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무시해야 합니다. 그런 소비를 하는 분들은 분명 부자는 아니더라도 빚을 지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러저러하게 드려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것은 은혜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번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였던 분량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아주 맛있는 과일이 생겨서 그것을 보자마자 누군가를 떠올리며 좀 나누어 주겠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 주려고 한 개수보다 적게 주고 싶어지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부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언가 달라고 할까봐 걱정합니다. 좋은 것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빼앗길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위해서 좋은 것은 다 모아 놓고 담도 높게 칩니다. 그 좋은 것들을 홀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마음에는 형제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을 기억할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부자가 계시다면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도 비판하는 심정으로 선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비판에서 저 또한 자유롭지 않은 것을 이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부자의 습성은 부자끼리 어울리게 합니다. 혹 가난한 사람이 그들의 틈에 있다 할지라도 결코 융합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어떻게 하면 더 얻을까 더 지킬까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일단 어느 정도의 부를 이룬 후에는 돈이 스스로 굴러들어오기 때문에 부자의 마인드-쥔 손을 펴지 않는-를 지켜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쾌락을 따르는 삶
사람들은 누구나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기적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이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삽니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신월동의 사람들이 목동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신월동은 주로 주택이나 빌라가 많은데 경제적수준 상 남편들이 외도하는 경우가 적고 목동의 사람들은 주로 아파트 거주자들이 많은 데 각방을 쓰는 가정이 많다고 누군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도 될 수 있고 정확한 통계에 의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쾌락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유명인들 중에 섹스중독으로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하루에 세 시간 이상 게임을 한다면 그는 중독증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알코올에 중독되고 마약에 중독이 된 이들이 자기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얼마만큼의 마약이 유포되고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미의 경우 마약의 피해자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마약중독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쾌락의 끝은 자기파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삼손은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였습니다. 그는 부모를 생각하여 꿀을 가져다가 부모에게 드릴정도의 효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삼손이라도 그가 쾌락을 따라 갔을 때에 그의 종말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몇 번에 걸친 드릴라의 체포 작전에도 그는 그것을 장난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끝내 자기의 비밀을 누설 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드릴라의 사랑이라고 하는 달콤한 쾌락에 그가 빠져 있을 때에 그는 자기의 사명도 잊은 채 멸망의 길로 달려간 것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쾌락을 좇는 삶에서는 자기 인생을 망치고 마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9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장
정의를 따르는 삶
어떤 사람들은 신념을 가지고 정의롭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만 어느 누구도 정의로운 삶을 완전히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종과 성, 계층과 교육받음의 여부가 사람들의 상황을 매우 복잡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한 편에서는 피해자가 되지만 어느 한 편에서는 가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동 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 박노해 시인은 평등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한 한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에 자기는 자기의 아내의 억압자이며 착취자인 것을 발견하였다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불을 꿰매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 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둔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장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의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하여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다른 이슈에 대하여는 유죄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위하여, 여성의 평등한 기회를 위하여 외치며 싸우는 중산층의 여성들은 계급갈등의 문제에서 중산층 남성과 같이 유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한 존경하는 선배가 계신데 그 분은 정의롭고 생각이 열린 분입니다. 그러나 남성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인식을 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이고 정의의 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저는 공산주의 이론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잠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한 동아리에 참여하였다가 그들이 공산주의의 계급투쟁을 주요 쟁점으로 삼아 미국의 흑인문제 외에도 제3세계의 나라들의 계급투쟁에 대한 논의들을 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정의를 세우는데 이제까지의 기득권층을 응징하고 벌주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복수에 대한 해결을 찾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정의를 외치고 정의를 위하여 그들의 평생을 바치며 희생하는 분들을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에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분노가 아니며-감리교신학대학에서 민중노래동아리 암하렛츠의 일원으로서 그 노래들을 사랑하였는데 때로는 노래를 부를 때에 까닭모를 분노가 내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곤 하였습니다-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승주목사가 뉴욕에서 느꼈던 충격은 뉴욕의 개혁적 지식인들-특히 기독교의-은 하나님의 자리에 정의를 모셔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그래서 미침례교회와 같이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을 모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신앙의 대상도 마치 정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비판과 질타, 그리고 결국에는 분노와 경멸에 이르는 감정들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때에 이승주목사는 생터스 예배에서 고백했던 그 고백-사랑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본문 2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거기 있던 유대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그들의 불멸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세력을 이기고 자기들의 나라를 다시 부강하게 세우는 “불패의 세계 제패자”로 오신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뒤엎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승리의 꿈을 십자가의 비전으로 바꾸셨던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 멸시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영광의 자리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만을 붙들고 살아가면 그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상은 대단합니다. 어떤 지역이든지 가보게 되면 우선 그 지역을 이끌고 있는 큰 교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 한국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복음을 들고 우리나라를 찾은 선교사들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온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 덕분입니다. 그들이 죽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희생한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거룩한 뜻을 위하여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야심을 품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이영민전도사의 친구 전도사가 왔다가 이야기 하던 중 옛날에는 목회사역에 대하여 어떠한 야망을 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자기의 야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들일 때에 그를 통하여 많은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코스모 랑Cosmo Lang은 세속적 야망으로 불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 좋은 친구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인 야심을 버리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가 영국 교회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던 시절에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중 “네가 필요하노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기의 야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린 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인 소원과 개인적인 야심을 버릴 때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야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버리시기 바랍니다.
“25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바칠 때에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리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주의와 자기 안일에 빠져 있습니다. 인생의 분주함이 모두가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다른 이들의 필요에 대해서, 갈급함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안일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주님 앞에 경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셔서는 안 된다고 할 때에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자신의 이익과 안전, 출세를 포기하고 이 세계를 위하여 애쓰고 힘쓴 성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인생관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은 죽음으로만 가질 수 있고 그 생명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유지시키고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를 통하여 위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가르치셨습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구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택합니까? 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 복을 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려면 그 방법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무리 굳어진 마음의 소유자라도 그 마음을 녹이고 변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을 위하여 썩어지고 죽어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믿음의 삶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명확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와 명예와 쾌락을 좇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시기 바랍니다. 한 때 돌풍을 일으켰던 그 질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를 항상 자신에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내가 처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위하여 내가 봉사하고 낮아지는 아름다운 삶의 주인공이 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요12:23-26
목적: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뒤따른다.
흐름: 부귀를 따르는 삶/쾌락을 따르는 삶/정의를 따르는 삶/나를 따르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박수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부귀를 따르는 삶
사람들은 흔히 부를 추구하고 그 부를 통하여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아주 놀랄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선출될 가능성이 수치상으로 높은 것을 우리가 뉴스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선거운동 초기에는 공화당후보인 맥케인 후보가 민주당 후보 오바마를 지지도에서 앞서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업체가 운영난으로 파산하게 되면서 미국과 세계의 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실패로 경기가 둔화되고 고용이 줄며, 모기지 이자율이 치솟는 등 미국경제에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국과 세계경제의 원리가 되었던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뒤를 잇는 주자로 보이는 맥케인 후보는 지금 모든 미 국민이 보는 앞에서 실패자가 된 부시 대통령의 분신 외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정책면에서도 오바마 후보의 정책이 경제를 일으키고 힘없고 돈 없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나마 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명분보다는 자신들의 실리 면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경제에 실패할 것 같은 맥케인 후보 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열 것으로 보이는 오바마후보를 더 지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측면들은 생략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의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중에 시드니 화이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속에는 다양한 괴짜 캐릭터들이 있는데 그 중에 테런스라는 졸업생이 있습니다. 그는 그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자기만의 연구를 위해 학교에 몇 년간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색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함께 지내는 룸메이트조차 그가 관심하며 연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그가 박수를 받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순간이 있습니다. 말쑥한 차림을 한 테런스가 멋진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데 한 눈에 보기에도 그에게 엄청난 변화가 있는 듯했습니다. 룸메이트들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테런스는 자기의 연구하던 예측이론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의아한 눈길을 보냅니다. 그제야 테런스가 자기의 예측이론을 한 인터넷 회사에 10만 달러에 팔았다고 이야기하니 룸메이트들이 신이 나서 축하를 하고 부러워합니다. 이것은 이 영화의 주된 장면이 아닌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덧붙여진 것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충분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루었다고 할 때에 물질은 그것을 말해주는 척도가 됩니다. 흔히 하는 우스갯말로 티코를 가지고 고급 호텔에 진입하려 했으나 자꾸만 밖으로 돌리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음식점엘 가더라도 좋은 차를 가지고 가면 더 대접이 좋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돈의 적고 많음에 따라서 좋은 대우를 받거나 아니면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고 느끼기에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을 따르는 삶이 좋다고 하고 한 번 그것을 위해 살아봅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열심히 일하여 아주 많은 물질을 벌어들입니다. 때로는 사기꾼도 만나고 때로는 스스로 우매하여서 실패하기도 하지만 물질을 벌어들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자가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처럼 생각하고 부자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듣자하니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돈을 쓰기 전에 일 곱 번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돈을 쓸 일이 줄어들어 자기 가진 것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부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비는 줄여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마트에 갔는데 필요한 목록을 적어간 것 외에 아주 싸게 파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무시해야 합니다. 그런 소비를 하는 분들은 분명 부자는 아니더라도 빚을 지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러저러하게 드려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것은 은혜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번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였던 분량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아주 맛있는 과일이 생겨서 그것을 보자마자 누군가를 떠올리며 좀 나누어 주겠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 주려고 한 개수보다 적게 주고 싶어지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부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언가 달라고 할까봐 걱정합니다. 좋은 것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빼앗길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위해서 좋은 것은 다 모아 놓고 담도 높게 칩니다. 그 좋은 것들을 홀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마음에는 형제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을 기억할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부자가 계시다면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도 비판하는 심정으로 선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비판에서 저 또한 자유롭지 않은 것을 이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부자의 습성은 부자끼리 어울리게 합니다. 혹 가난한 사람이 그들의 틈에 있다 할지라도 결코 융합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어떻게 하면 더 얻을까 더 지킬까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일단 어느 정도의 부를 이룬 후에는 돈이 스스로 굴러들어오기 때문에 부자의 마인드-쥔 손을 펴지 않는-를 지켜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쾌락을 따르는 삶
사람들은 누구나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기적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이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삽니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신월동의 사람들이 목동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신월동은 주로 주택이나 빌라가 많은데 경제적수준 상 남편들이 외도하는 경우가 적고 목동의 사람들은 주로 아파트 거주자들이 많은 데 각방을 쓰는 가정이 많다고 누군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도 될 수 있고 정확한 통계에 의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쾌락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유명인들 중에 섹스중독으로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하루에 세 시간 이상 게임을 한다면 그는 중독증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알코올에 중독되고 마약에 중독이 된 이들이 자기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얼마만큼의 마약이 유포되고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미의 경우 마약의 피해자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마약중독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쾌락의 끝은 자기파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삼손은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였습니다. 그는 부모를 생각하여 꿀을 가져다가 부모에게 드릴정도의 효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삼손이라도 그가 쾌락을 따라 갔을 때에 그의 종말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몇 번에 걸친 드릴라의 체포 작전에도 그는 그것을 장난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끝내 자기의 비밀을 누설 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드릴라의 사랑이라고 하는 달콤한 쾌락에 그가 빠져 있을 때에 그는 자기의 사명도 잊은 채 멸망의 길로 달려간 것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쾌락을 좇는 삶에서는 자기 인생을 망치고 마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9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장
정의를 따르는 삶
어떤 사람들은 신념을 가지고 정의롭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만 어느 누구도 정의로운 삶을 완전히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종과 성, 계층과 교육받음의 여부가 사람들의 상황을 매우 복잡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한 편에서는 피해자가 되지만 어느 한 편에서는 가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동 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 박노해 시인은 평등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한 한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에 자기는 자기의 아내의 억압자이며 착취자인 것을 발견하였다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불을 꿰매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 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둔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장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의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하여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다른 이슈에 대하여는 유죄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위하여, 여성의 평등한 기회를 위하여 외치며 싸우는 중산층의 여성들은 계급갈등의 문제에서 중산층 남성과 같이 유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한 존경하는 선배가 계신데 그 분은 정의롭고 생각이 열린 분입니다. 그러나 남성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인식을 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이고 정의의 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저는 공산주의 이론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잠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한 동아리에 참여하였다가 그들이 공산주의의 계급투쟁을 주요 쟁점으로 삼아 미국의 흑인문제 외에도 제3세계의 나라들의 계급투쟁에 대한 논의들을 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정의를 세우는데 이제까지의 기득권층을 응징하고 벌주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복수에 대한 해결을 찾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정의를 외치고 정의를 위하여 그들의 평생을 바치며 희생하는 분들을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에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분노가 아니며-감리교신학대학에서 민중노래동아리 암하렛츠의 일원으로서 그 노래들을 사랑하였는데 때로는 노래를 부를 때에 까닭모를 분노가 내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곤 하였습니다-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승주목사가 뉴욕에서 느꼈던 충격은 뉴욕의 개혁적 지식인들-특히 기독교의-은 하나님의 자리에 정의를 모셔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그래서 미침례교회와 같이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을 모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신앙의 대상도 마치 정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비판과 질타, 그리고 결국에는 분노와 경멸에 이르는 감정들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때에 이승주목사는 생터스 예배에서 고백했던 그 고백-사랑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본문 2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거기 있던 유대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그들의 불멸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세력을 이기고 자기들의 나라를 다시 부강하게 세우는 “불패의 세계 제패자”로 오신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뒤엎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승리의 꿈을 십자가의 비전으로 바꾸셨던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 멸시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영광의 자리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만을 붙들고 살아가면 그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상은 대단합니다. 어떤 지역이든지 가보게 되면 우선 그 지역을 이끌고 있는 큰 교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 한국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복음을 들고 우리나라를 찾은 선교사들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온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 덕분입니다. 그들이 죽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희생한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거룩한 뜻을 위하여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야심을 품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이영민전도사의 친구 전도사가 왔다가 이야기 하던 중 옛날에는 목회사역에 대하여 어떠한 야망을 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자기의 야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들일 때에 그를 통하여 많은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코스모 랑Cosmo Lang은 세속적 야망으로 불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 좋은 친구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인 야심을 버리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가 영국 교회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던 시절에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중 “네가 필요하노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기의 야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린 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인 소원과 개인적인 야심을 버릴 때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야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버리시기 바랍니다.
“25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바칠 때에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리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주의와 자기 안일에 빠져 있습니다. 인생의 분주함이 모두가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다른 이들의 필요에 대해서, 갈급함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안일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주님 앞에 경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셔서는 안 된다고 할 때에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자신의 이익과 안전, 출세를 포기하고 이 세계를 위하여 애쓰고 힘쓴 성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인생관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은 죽음으로만 가질 수 있고 그 생명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유지시키고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를 통하여 위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가르치셨습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구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택합니까? 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 복을 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려면 그 방법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무리 굳어진 마음의 소유자라도 그 마음을 녹이고 변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을 위하여 썩어지고 죽어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믿음의 삶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명확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와 명예와 쾌락을 좇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시기 바랍니다. 한 때 돌풍을 일으켰던 그 질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를 항상 자신에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내가 처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위하여 내가 봉사하고 낮아지는 아름다운 삶의 주인공이 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2008년 10월 12일 일요일
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 081012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
본문: 창30:29-30
목적: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한다.
흐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는 곳/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 세상의 가치 안에 공존하기의 어지러움/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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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을 다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좋은 예배처소를 주시고 우리 겨자씨교회가 물질의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는 곳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듣는 동안에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가정을 돌아봅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먼저 집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가구도 장만하고 맛있는 것도 사다 두고 먹으며 몸을 쉴 수 있는 집이 필요합니다.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합니까? 어떤 분들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것을 그대로 이어받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찍이 자수성가하여 꽤 여유 있는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분들이 내 집 마련하는 일로 온 신경을 그것에 쏟으며 애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집은 참 중요하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몇 십 년의 인내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집을 가지면 같은 부류의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집에 대한 걱정이 어느 정도 해결된 분들은 자녀들의 문제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30대 이전에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하는 것에 의해 그 사람의 삶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진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명대학이나 특정 인기 학과를 졸업하게 되면 사회적인 입지가 견고하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가도를 평탄하게 할 것을 알기에 과외를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과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 어떤 학문적인 수준에 도달하기 보다는 주입식으로 아니면 과다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은 모습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받을 때에 그 성적을 보는 이유는 높은 성적을 가진 학생이 학습능력도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고액과외를 통하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그것은 결국 대학에서 필요한 학습능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이 그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 일을 결과합니다. 어쨌든 일류대학 일류학과를 졸업하는 것을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을 보장받고 실제로 그러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됩니다. 좋은 대학은 좋은 일자리와 선호하는 배우자를 만나는 길이 됩니다.
좋은 직장에 입사한 사람을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휴가 때에 집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서 일류호텔에서 여유 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옵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 두 세 달치 생활비가 되는 돈을 이삼일 만에 다 쓰고도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좋은 직장에서 많은 봉급을 받기에 그 정도는 커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왕에 일하고 살 바에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직장에서도 아랫사람으로 일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부리는 상관의 자리에 앉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승진을 위하여 못할 일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옛날 같으면 자기가 왕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해치고 인간관계를 해치고 가정이 파탄 되어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하여 끝도 모르고 달려갑니다. 자기의 하는 그 일을 위하여 영혼을 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 성취를 하고자하는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리고는 끝내 그 일을 해내고 처음 마라톤 주자와 같이 쓰러져 죽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조금 과장되기도 하고 조금 축소되기도 하였지만 세상의 사람들이 달려가는 지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여기 말씀드린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십니까? 더러 해당이 되십니까? 그럴 때에 이런 질문을 한 번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모든 치열한 삶이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지?”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의 영광과 안일만을 구할 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불신의 사람이 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생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사람들의 질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자손으로서,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마지막 축복을 받은 후천적, 또는 획득적 장자였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자기 형, 에서의 모든 복과 장자권을 빼앗은 그 얍삽함은 그의 신앙을 조금 가리고 있지만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맨손으로 도망갈 정도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일한 후에 얻지 못하고 레아를 먼저 얻었고 그 후에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그를 위하여 다시 한 번 7년을 일하는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묻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이 질문은 외삼촌 라반과의 대화 중에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향한 질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가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곱은 자기 부인들을 얻기 위하여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이끌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이 돌아가는 것보다 자기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창세기 30장 27-28절의 말씀입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라반의 이 말에 대한 야곱의 질문의 뜻은 이렇습니다. “외삼촌, 나를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으셨지요? 나도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야곱의 이제까지의 상황은 그가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복을 주셔서 라반을 부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자기의 집을 세우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내가 누리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풍요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야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네가 가고 있는 길을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세상의 가치 안에 공존하기의 어지러움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복음 15장
성도의 삶은 세상과 친할 수 없습니다. 재물관이나 인간관계나 그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세상과 대별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돈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쓰는 일이 가능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내 돈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즉 하나님의 것을 내가 맡아서 사용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고, 내 자녀도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가진 것이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만약 성도에게 이러한 청지기 정신이 없을 때에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혹은 어머니로 믿고 있는가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승주목사가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혼탁한 정신으로 살고 있을 때에-이러한 비판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것이지 결코 사회적 비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찬양 한 곡을 통하여 저를 깨뜨리셨습니다.
이 세상의 부요함보다
이 세상의 부요함보다 이세상의 좋은 친구보다
나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귀한 분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얻고 내가 원한 삶을 사는 것보다
어느 누구의 그 사랑보다
귀한 분 붙드소서 주님 나를 놓치 마소서
내 영혼 비추시고 내게 생명 주신 주님 주의 사랑 너무 커
나의 맘 드려 주께 주님만 영원히 사랑해 나의 사랑 멈추지 않으리
주님만 영원히 사랑해 나의사랑 멈추지 않으리
그 때에 이승주목사는 자기의 꿈을 이루는 것을 세상의 어느 것 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 이러 저러한 인생을 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주님을 향한 헌신입니다”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옳다고 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한 곡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목사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고백이 위선적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처절하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목사의 마음에 가득한 것은 자기 사랑이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누구 앞에서? 장수감리교회의 어린이들 앞에서 2006년 여름에.... 부끄러웠습니다. “오! 하나님,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도,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도, 목사와 장로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미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깨닫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말이 잘 통할 때에 그렇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들과 대화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때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을 때에 그렇습니다.
폴 워셔 Paul Washer 목사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을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경우에 비유하면서 설교자에게 돌이 날아오지 않고 그를 향하여 환호성이 들릴 때에 자기는 오히려 자기가 가짜가 아닐까하여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자기의 설교에 대하여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고 돌을 던지는 자가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얼굴에 돌을 던져서 맞을 뻔 하자 그 때에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을 미워하여 그들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수 천 년을 지나오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오늘의 시대에 기독교가 세상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세상의 가치에 설득당하고 혼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합니까? 여러분의 삶의 원동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옵니까? 아니면 세상과 짝하여 그들을 더욱 기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가치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분의 자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
야곱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그에게는 아직 결론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고향에는 언제든 그를 만나면 죽이겠다는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친척이기는 하지만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전적으로 후원하는 후원자라기보다 그를 이용하여 부를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나마 거기서 얻은 부인들과 자녀들이 그의 위안이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으나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자기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조금은 회의적인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 나의 집을 세우리이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바꾸어 말하면 “성도의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우리가 다 함께 선포합니다. “( )( )의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이 선포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여러분의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모범으로 보이시면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때에 받을 복에 대하여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들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이승주목사는 최근에 목회가 어느 한 측면에서 두 부류의 목회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과 동일하게 목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목회가 있고 자기가 하는 목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목회하면 항상, 해보니 안 된다, 내 경험으로 봐서 안 된다, 몇 년간 해보았는데 이러한 패턴으로 진행되더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 되어서 교회는 정체되어 있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어려운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승주목사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목회는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목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초대하는 목회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의지를 꺾고 심지어 목회의 방향까지도 하나님께 물어서 목회하는 경우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리석어 보이고 더디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목회입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목회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의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간관계나 자기의 계획으로 고아들을 먹이고 입힌 것이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여 유명하게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지만 수많은 설교자들을 통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증거 되리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고 진심으로 그를 섬겼던 여인과 같이 조지 뮬러 목사님의 믿음의 삶도 복음과 함께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지 뮬러의 집을 세우시고 그의 인생을 이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야곱의 집을 세워주셨습니까? 몇 구절을 읽어봅니다. 야곱이 라헬과 레아, 자기 부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31장 “5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8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외삼촌 라반의 변덕스러움과 탐욕스러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야곱에게 인내를 주셨습니다. 그는 무던히 라반을 섬겼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야곱에게 큰 이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속이는 사람과 상대할 때에 명심할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에게 대적하고, 그들과 같이 사악하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라반에게 각각 말씀하십니다: 창세기31장, “12...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24...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의 보호자이십니다. 야곱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해를 당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 야곱의 안전을 책임지셨습니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다 보시고 계시기에 오히려 매 순간을 거룩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여러분의 보호자로 인식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곳에서 도움이 오지만 그들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일이 좋은 결과로 귀결되었을 때에 반드시 그일로 인한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야곱과 그 형, 에서의 대화입니다: 창세기 33장 “9...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를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윈윈 WIN WIN 정책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쪽에게만 이익이 되는 정책이 아니라 쌍방이 함께 득을 보는 정책을 말합니다. 이 정책은 국가 간의 합의와 조약에도 적용이 될 것이고, 기업 간에 혹은 개인끼리의 약속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에게 하나님께서는 윈윈의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을 잘되게 하시기 위하여 에서에게도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주심을 사모합니다. 나만 잘되고 다른 사람의 시기 질투를 한 몸에 받을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복 주시는 대상이 되는 것을 소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자기의 종들과 가축 떼와 자기의 가족을 몇 떼로 나눌 정도로 크게 번성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여 실수 했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했던 형 에서와의 평화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그의 달려온 길을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한을 품을 일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인생의 여정이 완벽한 모범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손에 그가 강하게 붙들려 있었으므로 더 이상 아쉬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성공하는 인생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입니다. 성공이라고 하는 단어가 지시하는 내용도 세상의 사람들의 달려가는 그 목적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인생의 끝이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할 수 도 있습니다. 물질의 빈곤으로, 명예 훼손으로, 사람들의 외면으로 인한 외로움으로, 병들고 지친 모습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택한 분들은 의지적으로 가시밭길을 택하였던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그랬고 적십자사의 창시자, 장 앙리 뒤낭과 같은 이들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을 살아내는 어떤 원동력을 붙드는 것인데 그 원동력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집을 세우십니다. 어느 곳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든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여러분의 삶을 이끄시는 것 또한 믿으시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부족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옛 조상들의 받았던 복을 누리라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순례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더욱 기뻐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때마다 이겨낼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창30:29-30
목적: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체험한다.
흐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는 곳/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 세상의 가치 안에 공존하기의 어지러움/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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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을 다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렇게 좋은 예배처소를 주시고 우리 겨자씨교회가 물질의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축복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달려가는 곳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듣는 동안에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가정을 돌아봅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먼저 집이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가구도 장만하고 맛있는 것도 사다 두고 먹으며 몸을 쉴 수 있는 집이 필요합니다.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합니까? 어떤 분들은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것을 그대로 이어받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일찍이 자수성가하여 꽤 여유 있는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분들이 내 집 마련하는 일로 온 신경을 그것에 쏟으며 애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집은 참 중요하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몇 십 년의 인내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집을 가지면 같은 부류의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생활을 편안하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집에 대한 걱정이 어느 정도 해결된 분들은 자녀들의 문제에 더 많은 신경을 쓰기도 합니다. 30대 이전에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 하는 것에 의해 그 사람의 삶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진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명대학이나 특정 인기 학과를 졸업하게 되면 사회적인 입지가 견고하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가도를 평탄하게 할 것을 알기에 과외를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과외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 어떤 학문적인 수준에 도달하기 보다는 주입식으로 아니면 과다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은 모습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대학에서 학생을 받을 때에 그 성적을 보는 이유는 높은 성적을 가진 학생이 학습능력도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고액과외를 통하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그것은 결국 대학에서 필요한 학습능력을 갖추지 못한 학생이 그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 일을 결과합니다. 어쨌든 일류대학 일류학과를 졸업하는 것을 통해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을 보장받고 실제로 그러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됩니다. 좋은 대학은 좋은 일자리와 선호하는 배우자를 만나는 길이 됩니다.
좋은 직장에 입사한 사람을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휴가 때에 집에서 쉬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나가서 일류호텔에서 여유 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옵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에 두 세 달치 생활비가 되는 돈을 이삼일 만에 다 쓰고도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좋은 직장에서 많은 봉급을 받기에 그 정도는 커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왕에 일하고 살 바에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직장에서도 아랫사람으로 일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부리는 상관의 자리에 앉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승진을 위하여 못할 일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옛날 같으면 자기가 왕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해치고 인간관계를 해치고 가정이 파탄 되어도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위하여 끝도 모르고 달려갑니다. 자기의 하는 그 일을 위하여 영혼을 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 성취를 하고자하는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리고는 끝내 그 일을 해내고 처음 마라톤 주자와 같이 쓰러져 죽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조금 과장되기도 하고 조금 축소되기도 하였지만 세상의 사람들이 달려가는 지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여기 말씀드린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십니까? 더러 해당이 되십니까? 그럴 때에 이런 질문을 한 번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모든 치열한 삶이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지?”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의 영광과 안일만을 구할 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불신의 사람이 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에 생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사람들의 질문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은 이삭의 아들이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입니다. 그의 자손으로서,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마지막 축복을 받은 후천적, 또는 획득적 장자였습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자기 형, 에서의 모든 복과 장자권을 빼앗은 그 얍삽함은 그의 신앙을 조금 가리고 있지만 그는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맨손으로 도망갈 정도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일한 후에 얻지 못하고 레아를 먼저 얻었고 그 후에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그를 위하여 다시 한 번 7년을 일하는 인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묻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이 질문은 외삼촌 라반과의 대화 중에 나온 것이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향한 질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유는 그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가에 대한 것들입니다.
야곱은 자기 부인들을 얻기 위하여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이끌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이 돌아가는 것보다 자기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창세기 30장 27-28절의 말씀입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라반의 이 말에 대한 야곱의 질문의 뜻은 이렇습니다. “외삼촌, 나를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으셨지요? 나도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야곱의 이제까지의 상황은 그가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복을 주셔서 라반을 부유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도 자기의 집을 세우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내가 누리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풍요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내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야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네가 가고 있는 길을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세상의 가치 안에 공존하기의 어지러움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복음 15장
성도의 삶은 세상과 친할 수 없습니다. 재물관이나 인간관계나 그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세상과 대별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 돈 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쓰는 일이 가능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내 돈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즉 하나님의 것을 내가 맡아서 사용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고, 내 자녀도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가진 것이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만약 성도에게 이러한 청지기 정신이 없을 때에 우리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혹은 어머니로 믿고 있는가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승주목사가 세상의 가치에 물들어 혼탁한 정신으로 살고 있을 때에-이러한 비판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것이지 결코 사회적 비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찬양 한 곡을 통하여 저를 깨뜨리셨습니다.
이 세상의 부요함보다
이 세상의 부요함보다 이세상의 좋은 친구보다
나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 더 귀한 분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얻고 내가 원한 삶을 사는 것보다
어느 누구의 그 사랑보다
귀한 분 붙드소서 주님 나를 놓치 마소서
내 영혼 비추시고 내게 생명 주신 주님 주의 사랑 너무 커
나의 맘 드려 주께 주님만 영원히 사랑해 나의 사랑 멈추지 않으리
주님만 영원히 사랑해 나의사랑 멈추지 않으리
그 때에 이승주목사는 자기의 꿈을 이루는 것을 세상의 어느 것 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옵소서” 하고 기도하기보다 “주님 제가 이러 저러한 인생을 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주님을 향한 헌신입니다”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포기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옳다고 하는 길을 고집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한 곡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목사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고백이 위선적임을 지적하셨습니다. 처절하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목사의 마음에 가득한 것은 자기 사랑이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누구 앞에서? 장수감리교회의 어린이들 앞에서 2006년 여름에.... 부끄러웠습니다. “오! 하나님,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도,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도, 목사와 장로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미처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깨닫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말이 잘 통할 때에 그렇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들과 대화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때에 그렇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을 때에 그렇습니다.
폴 워셔 Paul Washer 목사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을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경우에 비유하면서 설교자에게 돌이 날아오지 않고 그를 향하여 환호성이 들릴 때에 자기는 오히려 자기가 가짜가 아닐까하여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자기의 설교에 대하여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고 돌을 던지는 자가 없어서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가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얼굴에 돌을 던져서 맞을 뻔 하자 그 때에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을 미워하여 그들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수 천 년을 지나오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오늘의 시대에 기독교가 세상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도들이 세상의 가치에 설득당하고 혼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합니까? 여러분의 삶의 원동력이 하나님에게서 나옵니까? 아니면 세상과 짝하여 그들을 더욱 기뻐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가치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 분의 자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집을 세우시는 하나님
야곱의 인생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그에게는 아직 결론나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고향에는 언제든 그를 만나면 죽이겠다는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은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친척이기는 하지만 외삼촌 라반은 야곱을 전적으로 후원하는 후원자라기보다 그를 이용하여 부를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나마 거기서 얻은 부인들과 자녀들이 그의 위안이었습니다. 아니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힘이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없었으나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자기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조금은 회의적인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언제 나의 집을 세우리이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바꾸어 말하면 “성도의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우리가 다 함께 선포합니다. “( )( )의 집은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이 선포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여러분의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모범으로 보이시면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할 때에 받을 복에 대하여 오늘 본문 이후의 말씀들을 통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이승주목사는 최근에 목회가 어느 한 측면에서 두 부류의 목회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과 동일하게 목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목회가 있고 자기가 하는 목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목회하면 항상, 해보니 안 된다, 내 경험으로 봐서 안 된다, 몇 년간 해보았는데 이러한 패턴으로 진행되더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 되어서 교회는 정체되어 있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기 어려운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승주목사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목회는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반면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목회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초대하는 목회입니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의지를 꺾고 심지어 목회의 방향까지도 하나님께 물어서 목회하는 경우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리석어 보이고 더디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목회입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목회 가운데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의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간관계나 자기의 계획으로 고아들을 먹이고 입힌 것이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동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영광을 구하여 유명하게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지만 수많은 설교자들을 통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도 증거 되리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것을 아끼지 않고 진심으로 그를 섬겼던 여인과 같이 조지 뮬러 목사님의 믿음의 삶도 복음과 함께 전파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지 뮬러의 집을 세우시고 그의 인생을 이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야곱의 집을 세워주셨습니까? 몇 구절을 읽어봅니다. 야곱이 라헬과 레아, 자기 부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31장 “5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8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외삼촌 라반의 변덕스러움과 탐욕스러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야곱에게 인내를 주셨습니다. 그는 무던히 라반을 섬겼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야곱에게 큰 이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속이는 사람과 상대할 때에 명심할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에게 대적하고, 그들과 같이 사악하게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야곱과 라반에게 각각 말씀하십니다: 창세기31장, “12...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24...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여기서 하나님은 야곱의 보호자이십니다. 야곱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해를 당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 야곱의 안전을 책임지셨습니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변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다 보시고 계시기에 오히려 매 순간을 거룩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여러분의 보호자로 인식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곳에서 도움이 오지만 그들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그 일이 좋은 결과로 귀결되었을 때에 반드시 그일로 인한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야곱과 그 형, 에서의 대화입니다: 창세기 33장 “9...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를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윈윈 WIN WIN 정책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쪽에게만 이익이 되는 정책이 아니라 쌍방이 함께 득을 보는 정책을 말합니다. 이 정책은 국가 간의 합의와 조약에도 적용이 될 것이고, 기업 간에 혹은 개인끼리의 약속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에서에게 하나님께서는 윈윈의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을 잘되게 하시기 위하여 에서에게도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주심을 사모합니다. 나만 잘되고 다른 사람의 시기 질투를 한 몸에 받을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복 주시는 대상이 되는 것을 소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자기의 종들과 가축 떼와 자기의 가족을 몇 떼로 나눌 정도로 크게 번성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여 실수 했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했던 형 에서와의 평화가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그의 달려온 길을 돌아보며 후회하거나 한을 품을 일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인생의 여정이 완벽한 모범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손에 그가 강하게 붙들려 있었으므로 더 이상 아쉬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성공하는 인생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입니다. 성공이라고 하는 단어가 지시하는 내용도 세상의 사람들의 달려가는 그 목적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인생의 끝이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할 수 도 있습니다. 물질의 빈곤으로, 명예 훼손으로, 사람들의 외면으로 인한 외로움으로, 병들고 지친 모습으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택한 분들은 의지적으로 가시밭길을 택하였던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마더 테레사가 그랬고 적십자사의 창시자, 장 앙리 뒤낭과 같은 이들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을 살아내는 어떤 원동력을 붙드는 것인데 그 원동력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집을 세우십니다. 어느 곳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고 있든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여러분의 삶을 이끄시는 것 또한 믿으시고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부족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옛 조상들의 받았던 복을 누리라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순례자의 길에 들어선 것을 더욱 기뻐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때마다 이겨낼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2008년 10월 4일 토요일
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081004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본문: 요4:23-24
목적: 성도들이 예배의 신성함을 깨닫고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흐름: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기/ 십자가 그늘 아래 선 우리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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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기
할렐루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또 지금도 죄의 길로 기울어지는 우리들을 고쳐 세우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의 삶이 온전하여 지지 못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시편 34편 4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오늘 여러분을 향한 처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까?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어떤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까?
겨자씨교회로 임지를 옮기면서 저의 삶에서는 성과 속의 공간과 시간의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당 안에 저의 서재가 꾸며졌고 바로 문하나만 열면 예배당과 연결되는 숙소에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잠도 잘 안 오고 예배당을 지나다니는 것 때문에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예배당이라는 공간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달 남짓, 이곳에서 생활하고 보니 오히려 이곳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기쁨이 넘칩니다. 시편 15편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열망하는 자가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승주목사는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르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부러우시면 철야기도 준비하시고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며 말씀 보며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은 세속적인 직장과 교회가 아닌 일반 가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과 만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승주목사가 겨자씨교회에 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 목사를 멀리하시다가 겨자씨교회에 와서는 교회에서 생활을 하니까 가까이 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태초부터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잘 아시지요. 그 찬양에서 말하는 사랑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초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그 부분을 함께 불러보도록 합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갑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무신경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욕구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43절에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자기의 경건상태를 항상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기위하여 깨어있는 동안 매 시간 마다 자기의 경건상태를 기록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존 웨슬리 목사님은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관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지를 발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웨슬리의 삶과 닮은 점이 있습니까?
미국 침례교회 소속으로 이승주목사에게 복음적 관심에 있어서 큰 공감을 일으키고 있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분은 바로 다름 아닌, 폴 워셔(Paul Washer)입니다. “그 길(신앙의길)이 좁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렸다We Have Forgotten that the Way is Narrow.” 는 설교(True Disciple Conference 2007. in KS, USA. Session 7.)에서 평범한 미국의 침례교인들이 다 지옥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일생이 한 번, 아니면 몇 번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만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기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 들어갈 것처럼 믿는 데 그것이 그들의 죄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여기서 교리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워셔 목사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됨이 없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하신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사기치고, 예수 믿고도 남의 돈 갚지 않고, 예수 믿고도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는 잘못된 생활 습관에 젖어 있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 믿은 후에도,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이 생긴 후에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22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누웠다는 말이”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선포하면서 좁은길로 가라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좁은 길로 가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깨어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방향을 체크해야 합니다. 세 걸음 갔다가 한 걸음 물러서면 우리는 결국 두 걸음 앞으로 하나님께 다가간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곁에 머무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15편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십자가 그늘 아래 선 우리들
예수 믿는 자의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 우리가 거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415(471장)입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이 외의 다른 무엇을 여러분은 원하십니까? 예수 믿기 전까지 여러분을 얽어매고, 부자유하게 했던 것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유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전에는 내가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만큼 위하던 것들도 십자가 아래서는 그 빛이 바랜 것을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재물과, 명예와, 꿈과, 이상이 우리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하나님께 이러한 깨달음과 변화가 오도록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숨까지도 미워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그 희생이 감사하여서 사랑의 마음이 불 일 듯한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세상의 법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버린 지 오래입니다. 사도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서도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4장 “7우리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세상의 종 되었고, 죄의 종 되었던 여러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되신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
미국의 공업도시, 그래서 환경이 사람에게 잔인하게 척박한 곳, 가난이 들끓는 곳,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7살 먹은 소년 하나가 은행을 털다가 잡혔습니다. 그 때 그가 왜 은행털이범이 되었는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먼저는 자기가 은행털이에 성공하면 그 돈을 가지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은행에 들어갔고,
둘째는 혹시 자기 계획이 뒤틀려 잡힌다 해도 감옥에 가면 하루 세끼 식사를 할 수 있으니 그랬고,
마지막으로는 만약 경찰이 쏜 총에 맞는 다고 하여도 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은행을 털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소년이 말해준 세 가지 이유는 너무나 절박한, 도움의 손길로부터 완전히 소외 된 그의 삶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그 소년은 그의 소원대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 어린 소년이 자기의 꿈을 마음껏 펼쳐야 할 그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삶을 선택을 한 것입니까? 그를 돕는 자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빈궁함을 돌아보고 그를 먹이는 손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겨자씨교회에 부임해 오면서 이승주목사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물로 목사로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기심 때문에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겨자씨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승주목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승주목사가 필요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느끼게 되었을까요?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좌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 이승주목사가 감당해야할 목회의 사역들은 너무나 많고 풍부합니다.
이 설교를 써내러가는 중에 육칠십 대의 아저씨 한 분이 찹쌀떡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천 원에 그 떡을 사드리면서 미리 준비해둔 사과 한 개를 건네며 선물이라고 기분 좋게 드렸습니다. 예수 믿으시냐고 했더니 지금은 일이 바빠서 쉬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꼭 신앙생활 회복하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가 꼭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또 매 주일마다 찾아오시는 노숙자 한 분이 계신데, 지난주까지는 생각을 못하다가 이제 이번 주부터 실행하려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그분의 얼굴을 뵈니 피골이 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오시면 구제비만 드릴 것이 아니라 약간의 과일과 음식을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오실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담대하게 축복기도를 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그네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목회를 계속해서 해 나가려고 합니다.
얼마전 교회 바깥 계단을 청소하다가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는 중학생정도의 남자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깨가 처져있고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저를 보자 혼이 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 아이들 하나에게라도 친절한 말을 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 주님!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여러분도 이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고난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말할 수 없이 풍부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하나님을 독차지 하는 은혜를 우리 주님이 저에게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예배드릴 때에, 특히 예배를 인도할 때에 저는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사람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겨자씨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혼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돕는 배우자를 아직 주시지 않은 것은 이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나 봅니다.
찬양 인도 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이의 언어가 어떠해야 할까요? 예배를 인도하는 이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여 그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 사람의 언어는 사령관과 같이 지시적이어서도 안 되며, 아나운서나 나레이터와 같이 전달에만 치중하여도 안 됩니다. 인도자의 언어는 하나님과 회중이 함께 대화하도록 초대하는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 혼자 하나님께 도달하는 그리스 정교회적 독백이 아니라 회중도 함께 그 대화에 이끌어 들이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중을 대표하여 고백과, 결단과,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언어가 인도자에게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보다는 “오, 하나님, 주의 자녀들이 다 주 앞에 나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사오니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 속에 임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요한복음 4장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시되 여러분이 자신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에 받으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가 바클레이는 이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예배란 미신적인 예배이다. 이것은 어떤 필요 의식에서나 어떤 실재적인 갈망 때문에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이다....그러나 참된 종교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에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는 그 갈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진실하고 참된 예배는 사람이 자기의 영(spirit)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친교를 이룰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어떤 분은 한국교회가 예배 중독증에 걸려있다고 평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은 일주일에 한 번의 예배면 족하다고 여기고 여러 가지 제목이 걸려있는 예배, 즉 결혼축하예배, 돌예배 등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이 분의 비판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관심은 사람에게 있고 사람의 영광을 위하면서, 그 회합을 예배라는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진정한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향하여 살아가야 하는 데 그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매순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식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돌아볼 때에 어떤 때 에드리는 예배들에서 우리들은 예배 속에서 조차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야기들과 인간의 열망들과 인간의 영광에 눈이 멀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대화할 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까하는 관심이 예배 중에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특히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여러분의 정성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듣게 하시고, 왜 내 한 주일의 삶 속에서 이러 저러한 일들을 겪게 되었는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를 부르셔서 예배 속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품고계신 소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깊이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그 영광을 취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찬송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우리 삶의 기쁨이 됩니다. 매일의 삶이 예배 되게 하옵소서. 예배드릴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들이 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요4:23-24
목적: 성도들이 예배의 신성함을 깨닫고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흐름: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기/ 십자가 그늘 아래 선 우리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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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기
할렐루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또 지금도 죄의 길로 기울어지는 우리들을 고쳐 세우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의 삶이 온전하여 지지 못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시편 34편 4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오늘 여러분을 향한 처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까?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어떤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까?
겨자씨교회로 임지를 옮기면서 저의 삶에서는 성과 속의 공간과 시간의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당 안에 저의 서재가 꾸며졌고 바로 문하나만 열면 예배당과 연결되는 숙소에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잠도 잘 안 오고 예배당을 지나다니는 것 때문에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예배당이라는 공간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달 남짓, 이곳에서 생활하고 보니 오히려 이곳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기쁨이 넘칩니다. 시편 15편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열망하는 자가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승주목사는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르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부러우시면 철야기도 준비하시고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며 말씀 보며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은 세속적인 직장과 교회가 아닌 일반 가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과 만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승주목사가 겨자씨교회에 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 목사를 멀리하시다가 겨자씨교회에 와서는 교회에서 생활을 하니까 가까이 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태초부터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잘 아시지요. 그 찬양에서 말하는 사랑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초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그 부분을 함께 불러보도록 합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갑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무신경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욕구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43절에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자기의 경건상태를 항상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기위하여 깨어있는 동안 매 시간 마다 자기의 경건상태를 기록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존 웨슬리 목사님은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관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지를 발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웨슬리의 삶과 닮은 점이 있습니까?
미국 침례교회 소속으로 이승주목사에게 복음적 관심에 있어서 큰 공감을 일으키고 있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분은 바로 다름 아닌, 폴 워셔(Paul Washer)입니다. “그 길(신앙의길)이 좁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렸다We Have Forgotten that the Way is Narrow.” 는 설교(True Disciple Conference 2007. in KS, USA. Session 7.)에서 평범한 미국의 침례교인들이 다 지옥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일생이 한 번, 아니면 몇 번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만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기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 들어갈 것처럼 믿는 데 그것이 그들의 죄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여기서 교리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워셔 목사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됨이 없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하신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사기치고, 예수 믿고도 남의 돈 갚지 않고, 예수 믿고도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는 잘못된 생활 습관에 젖어 있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 믿은 후에도,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이 생긴 후에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22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누웠다는 말이”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선포하면서 좁은길로 가라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좁은 길로 가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깨어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방향을 체크해야 합니다. 세 걸음 갔다가 한 걸음 물러서면 우리는 결국 두 걸음 앞으로 하나님께 다가간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곁에 머무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15편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십자가 그늘 아래 선 우리들
예수 믿는 자의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 우리가 거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415(471장)입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이 외의 다른 무엇을 여러분은 원하십니까? 예수 믿기 전까지 여러분을 얽어매고, 부자유하게 했던 것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유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전에는 내가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만큼 위하던 것들도 십자가 아래서는 그 빛이 바랜 것을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재물과, 명예와, 꿈과, 이상이 우리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하나님께 이러한 깨달음과 변화가 오도록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숨까지도 미워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그 희생이 감사하여서 사랑의 마음이 불 일 듯한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세상의 법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버린 지 오래입니다. 사도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서도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4장 “7우리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세상의 종 되었고, 죄의 종 되었던 여러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되신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
미국의 공업도시, 그래서 환경이 사람에게 잔인하게 척박한 곳, 가난이 들끓는 곳,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7살 먹은 소년 하나가 은행을 털다가 잡혔습니다. 그 때 그가 왜 은행털이범이 되었는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먼저는 자기가 은행털이에 성공하면 그 돈을 가지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은행에 들어갔고,
둘째는 혹시 자기 계획이 뒤틀려 잡힌다 해도 감옥에 가면 하루 세끼 식사를 할 수 있으니 그랬고,
마지막으로는 만약 경찰이 쏜 총에 맞는 다고 하여도 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은행을 털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소년이 말해준 세 가지 이유는 너무나 절박한, 도움의 손길로부터 완전히 소외 된 그의 삶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그 소년은 그의 소원대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 어린 소년이 자기의 꿈을 마음껏 펼쳐야 할 그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삶을 선택을 한 것입니까? 그를 돕는 자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빈궁함을 돌아보고 그를 먹이는 손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겨자씨교회에 부임해 오면서 이승주목사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물로 목사로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기심 때문에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겨자씨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승주목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승주목사가 필요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느끼게 되었을까요?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좌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 이승주목사가 감당해야할 목회의 사역들은 너무나 많고 풍부합니다.
이 설교를 써내러가는 중에 육칠십 대의 아저씨 한 분이 찹쌀떡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천 원에 그 떡을 사드리면서 미리 준비해둔 사과 한 개를 건네며 선물이라고 기분 좋게 드렸습니다. 예수 믿으시냐고 했더니 지금은 일이 바빠서 쉬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꼭 신앙생활 회복하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가 꼭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또 매 주일마다 찾아오시는 노숙자 한 분이 계신데, 지난주까지는 생각을 못하다가 이제 이번 주부터 실행하려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그분의 얼굴을 뵈니 피골이 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오시면 구제비만 드릴 것이 아니라 약간의 과일과 음식을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오실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담대하게 축복기도를 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그네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목회를 계속해서 해 나가려고 합니다.
얼마전 교회 바깥 계단을 청소하다가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는 중학생정도의 남자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깨가 처져있고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저를 보자 혼이 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 아이들 하나에게라도 친절한 말을 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 주님!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여러분도 이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고난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말할 수 없이 풍부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하나님을 독차지 하는 은혜를 우리 주님이 저에게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예배드릴 때에, 특히 예배를 인도할 때에 저는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사람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겨자씨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혼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돕는 배우자를 아직 주시지 않은 것은 이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나 봅니다.
찬양 인도 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이의 언어가 어떠해야 할까요? 예배를 인도하는 이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여 그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 사람의 언어는 사령관과 같이 지시적이어서도 안 되며, 아나운서나 나레이터와 같이 전달에만 치중하여도 안 됩니다. 인도자의 언어는 하나님과 회중이 함께 대화하도록 초대하는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 혼자 하나님께 도달하는 그리스 정교회적 독백이 아니라 회중도 함께 그 대화에 이끌어 들이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중을 대표하여 고백과, 결단과,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언어가 인도자에게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보다는 “오, 하나님, 주의 자녀들이 다 주 앞에 나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사오니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 속에 임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요한복음 4장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시되 여러분이 자신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에 받으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가 바클레이는 이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예배란 미신적인 예배이다. 이것은 어떤 필요 의식에서나 어떤 실재적인 갈망 때문에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이다....그러나 참된 종교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에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는 그 갈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진실하고 참된 예배는 사람이 자기의 영(spirit)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친교를 이룰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어떤 분은 한국교회가 예배 중독증에 걸려있다고 평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은 일주일에 한 번의 예배면 족하다고 여기고 여러 가지 제목이 걸려있는 예배, 즉 결혼축하예배, 돌예배 등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이 분의 비판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관심은 사람에게 있고 사람의 영광을 위하면서, 그 회합을 예배라는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진정한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향하여 살아가야 하는 데 그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매순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식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돌아볼 때에 어떤 때 에드리는 예배들에서 우리들은 예배 속에서 조차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야기들과 인간의 열망들과 인간의 영광에 눈이 멀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대화할 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까하는 관심이 예배 중에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특히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여러분의 정성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듣게 하시고, 왜 내 한 주일의 삶 속에서 이러 저러한 일들을 겪게 되었는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를 부르셔서 예배 속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품고계신 소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깊이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그 영광을 취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찬송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우리 삶의 기쁨이 됩니다. 매일의 삶이 예배 되게 하옵소서. 예배드릴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들이 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2008년 9월 28일 일요일
예수를 경험하라 080928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예수를 경험하라
본문: 막5:21-34
목적: 성도들이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고 경험한다.
흐름: 마음을 어지럽히는 삶의 문제들/병들고 가난한 여인 이야기/믿은 것을 행동에 옮기다/예수를 경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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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어지럽히는 삶의 문제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항상 저는 한 주일 동안에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많이 에너지를 쏟은 일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돌아봅니다. 오늘 생각해 보니 요 한 주간은 어린이들 전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시간에 준비해둔 전도용품을 가지고 나가서 나누어주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또 시장가는 시간에도 전도용품을 들고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을 만나기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우리 겨자씨교회의 공간에 들어오게 할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나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할까를 위해 정말로 고심하고 또 실망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을 많이 들인 일에는 실망도 크게 하는 법인데, 이번 주가 그랬습니다. 아이들과 약속한 시간에는 어디 가지도 못하고 다른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대기조’ 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바로 그 대기조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주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워했고, 저는 어떤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선영이, 진주, 진혁이, 서영이 ... 그리고 지난 주일에 늦잠자서 교회에 못 왔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우리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어린이 방과 후 센터와 씨앗도서관, 어린이&청소년 비전클럽이 이 지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하였습니다.
아직도 전도와 지역봉사로 겨자씨 교회의 직무를 담당하는 일이 저에게는 부담스럽고 결과도 없지만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제 두 달 지났는데, 앞으로 조금씩 사람들을 알아가고 어린이들을 알아가고, 그래서 이 근처의 주민들이 저를 겨자씨교회의 목사인 것을 알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이 알게 된 이승주목사의 근심이나 걱정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겨자씨교회가 마치 이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invisible(안보이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빛나며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교회가 된다면 그것만큼 이승주목사를 걱정시키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아주 많이 근심했고, 진취적인 마음이 아주 많이 후퇴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탈선하지 않고 바른 사람으로, 사회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사람으로, 그래서 사회의 리더가 되는 것을 위해 노심초사할 것입니다. 아이 교육을 위해 교육열이 센 특정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것도 요즘엔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지요.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자녀를 둔 부모를 만나는 일도 참으로 흔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자녀들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아니라 리더가 되어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노후연금보험, 암보험, 평생의료를 책임지는 손해보험에, 가족사랑생명보험에 가입하셨습니까? 여러분 중에서 유복한 분들은 이 모든 보험에 가입이 되셨겠지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일부만 가입하고 어떤 분들은 보험에 가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험한 병에 걸리면 어쩌나, 사고로 심한 장애를 입으면 어쩌나, 내가 없이 내 가족들이 어떻게 살까? 나이 들어 자식들 신세 지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등의 염려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함께 사는 가족 간의 사소한 문제들 또한 우리를 지치게 하고 슬프게 합니다. 아주 작은 말 하나가 마음에 상처를 주고, 서로 존중하지 않는 부부가 함께 살 때 상대방의 인생을 천한 것으로 격하시킵니다.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고통이 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직장이 변변치 않아 날마다 자신의 무능을 확인받아야 하는 분들도 혹 계실 것입니다.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아 항상 용두사미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전엔 부유한 삶을 살았는데 사회적 시류를 잘 못 읽어서, 또는 사기꾼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잃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란 아주 어려운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하고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어느 정도의 울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이든, 건강의 문제이든, 재정적인 것이든, 아니면 더 고상한 부분에 관한 것이든 저와 여러분에게는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그것이 실제로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병들고 가난한 여인 이야기
여기 병든 여인이 있습니다. 그 병이 생긴지 12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가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여인을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고쳐달라고 애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라는 사람은 자기 딸이 병들어 누었을 때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집에 오셔서 딸을 고쳐달라고 했고(막5:22-23), 수로보니게 여인도 자기 딸의 귀신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마15:22-28). 중풍병 들린 자는 그의 친구들이 직접 그를 둘러메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막2:3).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돕는 자도 없는 아주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병치레를 하다 보니 가진 가산도 다 허비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그 여인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자신의 자녀들과 가산을 다 잃은 욥과 같은 처지에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병든 여인이 사람들에게서 환영을 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과 슬픔과 울분은 그 여인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우리의 소외된 이웃들의 처지를 돌아보고 그들의 삶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5-27절,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며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다른 이들의 처지를 살피는 것은 친절함과 관용의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모두가 나의 경쟁자,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자, 나의 것을 탐내는 자로 생각할 때에는 어떠한 친절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은혜, 새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게 된 그 은혜에 감사할 때, 우리 마음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늘의 보화를 사모하라고 우리 예수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은 것을 행동에 옮기다
열두 해를 악한 병,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이 여인이 들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소문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자라고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할 만큼 추했던 그 여인이 용기를 냅니다. ‘저 여자는 왜 나와서 눈살 찌푸리게 해’ 하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계신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나아갑니다. 그러나 감히 그의 앞에 서지 못하고 뒤에서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진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스치는 가 싶더니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능력에 대하여 들은 바를 거짓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마음 속 깊이 믿었습니다. 또한 자신도 아주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 나사렛 예수에게 나아가서 그를 만날 때에 그 병이 낫게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두 번이나 확인 되었습니다. 그가 믿고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또 한 번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실 때에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다 말씀드렸을 때에 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유튜브YOU TUBE에 신학자 한 사람이 PD의 질문에 대답하는 중에 신념과 신앙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동영상이 있습니다(The Seduction of Christianity Part 1 - Faith). 신념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일종으로 자기 암시를 주고 “나는 꼭 그렇게 된다”하는 식의 생각을 갖는 것인데 그것을 통하여서도 병이 낫기도 하는데, 그것은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플라시보효과는 약효가 전혀 없는 약을 주면서 그것이 그 특정 질병에 효과가 있는 약이라고 주고 먹게 하였을 때 약효가 없는 약이지만 그것을 먹은 환자들이 치료된 것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이 아닌 것을 먹고 병이 낫는 효과를 플라시보 효과라고 합니다. 그것처럼 신념은 사람의 삶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념이 아닌 것을 요즘의 기독교인들이 잊고 있다고 합니다. 신앙은 내가 스스로 적극적인,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통해 내 삶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앙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산타클로스와 같은 우리의 선호하는 소원들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 없이, 예수님 없이, 성령님 없이 자기 스스로 긍정적으로 자기 삶을 지켜감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세속적인 노력도 중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께 찾아 나온 이 여인과 같은 믿음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여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이 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나아갈 때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나아가 정말로 자신의 병이 낫는 것을 경험하자 그 여인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예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해 주신 말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하신 것은 오히려 그 여인을 위한 말씀이었다기보다는 믿음 없이 의심하고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일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영과 육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믿음을 가질 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경험하라
여러분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현대에 들어서 신학이 고도로 발전하고 고고학과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가장 괴로운 이들은 바로 신학생들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시기가 짧으면 7-8년, 길면 10년 이상이 되는데, 그 기간 동안에 그리고 예수를 경험하기 까지 신학생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뇌가 큰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신학생이나 학교를 다니고 있는 전도사님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너무 자세히 신학적인 질문은 하지 마시기를 권면합니다. 그들의 그 모든 고민이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자라갈 것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순진한 신앙인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의심의 자료들을 다 검토한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연단된 신앙의 리더들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순례의 길이 너무나 험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시험에 비할 정도입니다. 목사가 되기로 주님 앞에 서원하고 그 길을 가는 이들을 축복하되 그들의 열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예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인간되셨던 그 삶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저는 감히 현대의 기독교 풍토를 비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지닌 목회자들이 존경받지 못하고 경영자의 마인드로 가득한 목회자들이 앞서가는 리더로 추앙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의 중직들이 사회에서 사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다보니 그들에게 조언을 하는 목사님께서 그들보다 더 나은 경영 마인들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긍정적, 적극적 신념으로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는 목회를 자기만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배우라고 세미나를 하는 경우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승주목사도 때로는 방법들을 사용하여 목회의 실타래를 풀어가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주님 앞에서 묵상할 때에 목회는 방법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이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풀어 가시는 그 방법에 나는 그저 순종하고 따르는 일이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를 경험하고 예수의 능력을 신뢰하고 예수의 삶에 대한 묵상이 있을 때에 겨자씨교회를 통한 저의 사역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예수 없이는 일 분 일초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삶을 위한 염려들은 떠나가고, 예수의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날마다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을 품은 자 되게 하옵소서. 나의 상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가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진정한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막5:21-34
목적: 성도들이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고 경험한다.
흐름: 마음을 어지럽히는 삶의 문제들/병들고 가난한 여인 이야기/믿은 것을 행동에 옮기다/예수를 경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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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어지럽히는 삶의 문제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항상 저는 한 주일 동안에 제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많이 에너지를 쏟은 일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돌아봅니다. 오늘 생각해 보니 요 한 주간은 어린이들 전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이들이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 시간에 준비해둔 전도용품을 가지고 나가서 나누어주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또 시장가는 시간에도 전도용품을 들고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을 만나기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 사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우리 겨자씨교회의 공간에 들어오게 할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나의 관심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할까를 위해 정말로 고심하고 또 실망도 하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을 많이 들인 일에는 실망도 크게 하는 법인데, 이번 주가 그랬습니다. 아이들과 약속한 시간에는 어디 가지도 못하고 다른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대기조’ 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바로 그 대기조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주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워했고, 저는 어떤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선영이, 진주, 진혁이, 서영이 ... 그리고 지난 주일에 늦잠자서 교회에 못 왔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우리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어린이 방과 후 센터와 씨앗도서관, 어린이&청소년 비전클럽이 이 지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도울 수 있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하게 하였습니다.
아직도 전도와 지역봉사로 겨자씨 교회의 직무를 담당하는 일이 저에게는 부담스럽고 결과도 없지만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제 두 달 지났는데, 앞으로 조금씩 사람들을 알아가고 어린이들을 알아가고, 그래서 이 근처의 주민들이 저를 겨자씨교회의 목사인 것을 알게 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이 알게 된 이승주목사의 근심이나 걱정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겨자씨교회가 마치 이 지역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invisible(안보이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빛나며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교회가 된다면 그것만큼 이승주목사를 걱정시키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아주 많이 근심했고, 진취적인 마음이 아주 많이 후퇴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를 둔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가 탈선하지 않고 바른 사람으로, 사회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사람으로, 그래서 사회의 리더가 되는 것을 위해 노심초사할 것입니다. 아이 교육을 위해 교육열이 센 특정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것도 요즘엔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지요.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자녀를 둔 부모를 만나는 일도 참으로 흔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자녀들이 사회에서 낙오자가 아니라 리더가 되어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노후연금보험, 암보험, 평생의료를 책임지는 손해보험에, 가족사랑생명보험에 가입하셨습니까? 여러분 중에서 유복한 분들은 이 모든 보험에 가입이 되셨겠지요. 그러나 어떤 분들은 일부만 가입하고 어떤 분들은 보험에 가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험한 병에 걸리면 어쩌나, 사고로 심한 장애를 입으면 어쩌나, 내가 없이 내 가족들이 어떻게 살까? 나이 들어 자식들 신세 지지 말아야 하는데... 하는 등의 염려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함께 사는 가족 간의 사소한 문제들 또한 우리를 지치게 하고 슬프게 합니다. 아주 작은 말 하나가 마음에 상처를 주고, 서로 존중하지 않는 부부가 함께 살 때 상대방의 인생을 천한 것으로 격하시킵니다. 함께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고통이 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직장이 변변치 않아 날마다 자신의 무능을 확인받아야 하는 분들도 혹 계실 것입니다.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아 항상 용두사미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전엔 부유한 삶을 살았는데 사회적 시류를 잘 못 읽어서, 또는 사기꾼을 만나서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잃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란 아주 어려운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하고 항변하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어느 정도의 울분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의 문제이든, 건강의 문제이든, 재정적인 것이든, 아니면 더 고상한 부분에 관한 것이든 저와 여러분에게는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그것이 실제로 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병들고 가난한 여인 이야기
여기 병든 여인이 있습니다. 그 병이 생긴지 12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여인에게 가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여인을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와 고쳐달라고 애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라는 사람은 자기 딸이 병들어 누었을 때에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집에 오셔서 딸을 고쳐달라고 했고(막5:22-23), 수로보니게 여인도 자기 딸의 귀신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마15:22-28). 중풍병 들린 자는 그의 친구들이 직접 그를 둘러메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막2:3).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돕는 자도 없는 아주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병치레를 하다 보니 가진 가산도 다 허비하였습니다. 성경에는 그 여인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자신의 자녀들과 가산을 다 잃은 욥과 같은 처지에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병든 여인이 사람들에게서 환영을 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과 슬픔과 울분은 그 여인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서 우리의 소외된 이웃들의 처지를 돌아보고 그들의 삶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5-27절,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며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다른 이들의 처지를 살피는 것은 친절함과 관용의 마음이 있을 때에 가능합니다. 모두가 나의 경쟁자,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자, 나의 것을 탐내는 자로 생각할 때에는 어떠한 친절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은혜, 새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게 된 그 은혜에 감사할 때, 우리 마음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늘의 보화를 사모하라고 우리 예수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은 것을 행동에 옮기다
열두 해를 악한 병, 혈루증으로 앓고 있는 이 여인이 들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소문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자라고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할 만큼 추했던 그 여인이 용기를 냅니다. ‘저 여자는 왜 나와서 눈살 찌푸리게 해’ 하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계신 곳으로 자꾸만 자꾸만 나아갑니다. 그러나 감히 그의 앞에 서지 못하고 뒤에서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진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 스치는 가 싶더니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능력에 대하여 들은 바를 거짓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의 마음 속 깊이 믿었습니다. 또한 자신도 아주 오랜 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이 나사렛 예수에게 나아가서 그를 만날 때에 그 병이 낫게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두 번이나 확인 되었습니다. 그가 믿고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또 한 번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실 때에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다 말씀드렸을 때에 그 믿음을 인정받았습니다.
유튜브YOU TUBE에 신학자 한 사람이 PD의 질문에 대답하는 중에 신념과 신앙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동영상이 있습니다(The Seduction of Christianity Part 1 - Faith). 신념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일종으로 자기 암시를 주고 “나는 꼭 그렇게 된다”하는 식의 생각을 갖는 것인데 그것을 통하여서도 병이 낫기도 하는데, 그것은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플라시보효과는 약효가 전혀 없는 약을 주면서 그것이 그 특정 질병에 효과가 있는 약이라고 주고 먹게 하였을 때 약효가 없는 약이지만 그것을 먹은 환자들이 치료된 것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이 아닌 것을 먹고 병이 낫는 효과를 플라시보 효과라고 합니다. 그것처럼 신념은 사람의 삶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념이 아닌 것을 요즘의 기독교인들이 잊고 있다고 합니다. 신앙은 내가 스스로 적극적인,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을 통해 내 삶을 향상시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신앙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산타클로스와 같은 우리의 선호하는 소원들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혹은 하나님 없이, 예수님 없이, 성령님 없이 자기 스스로 긍정적으로 자기 삶을 지켜감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세속적인 노력도 중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께 찾아 나온 이 여인과 같은 믿음과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여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아들이 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나아갈 때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나아가 정말로 자신의 병이 낫는 것을 경험하자 그 여인은 거룩한 두려움으로 예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해 주신 말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하신 것은 오히려 그 여인을 위한 말씀이었다기보다는 믿음 없이 의심하고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일도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오늘의 저와 여러분을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영과 육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믿음을 가질 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경험하라
여러분의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현대에 들어서 신학이 고도로 발전하고 고고학과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가장 괴로운 이들은 바로 신학생들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시기가 짧으면 7-8년, 길면 10년 이상이 되는데, 그 기간 동안에 그리고 예수를 경험하기 까지 신학생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뇌가 큰 이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교회에 신학생이나 학교를 다니고 있는 전도사님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너무 자세히 신학적인 질문은 하지 마시기를 권면합니다. 그들의 그 모든 고민이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자라갈 것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순진한 신앙인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의심의 자료들을 다 검토한 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연단된 신앙의 리더들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순례의 길이 너무나 험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시험에 비할 정도입니다. 목사가 되기로 주님 앞에 서원하고 그 길을 가는 이들을 축복하되 그들의 열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예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인간되셨던 그 삶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저는 감히 현대의 기독교 풍토를 비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지닌 목회자들이 존경받지 못하고 경영자의 마인드로 가득한 목회자들이 앞서가는 리더로 추앙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의 중직들이 사회에서 사업을 하고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다보니 그들에게 조언을 하는 목사님께서 그들보다 더 나은 경영 마인들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강단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보다는 긍정적, 적극적 신념으로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방법을 가르치는 목회를 자기만 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배우라고 세미나를 하는 경우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승주목사도 때로는 방법들을 사용하여 목회의 실타래를 풀어가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주님 앞에서 묵상할 때에 목회는 방법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 이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풀어 가시는 그 방법에 나는 그저 순종하고 따르는 일이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를 경험하고 예수의 능력을 신뢰하고 예수의 삶에 대한 묵상이 있을 때에 겨자씨교회를 통한 저의 사역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을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예수 없이는 일 분 일초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삶을 위한 염려들은 떠나가고, 예수의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태복음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날마다 동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을 품은 자 되게 하옵소서. 나의 상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가게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순종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진정한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2008년 9월 21일 일요일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080921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본문: 행20:17~24
목적: 성도들이 사도바울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나라를 위한 열심을 낸다.
흐름: 지역민을위한음악회/어린이+청소년비전클럽/어린이공부방/씨앗도서관/영어장학생선발육성/전도/사도바울의열정과사역/무엇을위한열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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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을 위한 음악회
옆에 계신 분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우리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하여 실행하고자 하는 몇 가지 일중에서 하나인 음악회를 위해서 이곳저곳에 전화하고 인터넷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좋은 공연들을 기획할 수 있는 연주자들도 많았고 단체들도 있었습니다. 단지 우리 교회가 그분들을 모시기에는 형편에 맞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적자원과 관련하여 아쉬웠던 점은 제가 알고 있는 이들 중에서 음악을 하면서 그것으로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혹 음악을 하시는 분들은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찾아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계획하기로는 20~30명 정도의 어린이들과 성인들이 우리 음악회에 초대될 수 있는데 행사 기획비는 적어도 50여만 원이 최소가 된다는 점이 어려움 중 하나였습니다. 1인당 약 2만 원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가치가 있을까 하는 점에서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연중 음악회를 개최하는 횟수를 줄여서라도 어떻게든 양질의 공연을 우리교회에서, 더 중요하게는 우리 지역에서 개최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때때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연과 음악회를 여는 목적은 순전히 지역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접하고 그들의 삶을 순화시키기를 바라고, 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이 더 있다면 그것은 지역의 사람들이 우리 겨자씨교회를 자꾸만 들어와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서 예수 믿지 않는 이들도 드나들 수 있는 친근한 공간으로 개방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누구나 사랑하셔서 믿는 자들에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청소년비전클럽
우리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하여 비전클럽을 운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먼저 시작할 때에는 어린이에게 중점을 두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나중에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 늘어나면 그 때는 청소년들에게도 눈을 돌려서 그들도 돌보려고 합니다. 어린이 비전클럽은 어린이 회원을 100명 내 외로 받습니다. 회비는 무료이며 어린이들의 신상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그들을 지도합니다. 일 년에 1~2회 공연관람을 갑니다. 또 1~2회 견학이나 소풍, 운동회를 합니다. 어린이들의 생일파티를 무료로 해 줍니다. 어린이들의 어려움이나 고민을 들어주고 기도해줍니다. 어린이 비전클럽은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꿈과 희망을 품고 자라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들의 소중함을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5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장
미래의 세대들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정신으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는 지난 몇 십여 년의 사역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겨자씨교회에는 위하여 기도하고 심방할 성인 성도들이 많지 않습니다. 위기를 기회를 만들라는 말대로 겨자씨교회에 성인들이 많지 않지만 그것에 실망하지 말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겨자씨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배와 같이 여깁니다. 그들에게는 이 나라 이 민족과 세계의 미래가 심겨져 있는 것을 믿으시고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공부방
어린이공부방은 엠에스씨 키즈 비전 센타 MSC Vision Center for Kids 라는 명칭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통해서 어린이들의 심성과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을 삶 속에서 돕고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주님께 나아와 기도 받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주님께 나아오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13~14).
겨자씨교회에 부임하면서 담임자인 저는 성인들을 위한 목회를 위한 노력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면서, 그리고 길 밖에 나가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만나면서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유는 지역의 환경이 어린이 친화적 환경이 아닙니다. 아니 주민들에게 살기 아주 힘든 환경입니다. 공원도 충분하지 않고 어린이들이 눈 돌릴 곳이 그리 마땅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교회는 교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의자들을 치우고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이일을 위해서는 새에덴 교회의 부교역자 장성철목사님이 그 시작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 가장 힘없는 자를 위한 사역에 그 중심을 둘것입니다. 가끔은 2년 내에, 3년 내에 자립교회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도 밀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우리 겨자씨교회의 사역을 이끌어 가실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립니다.
씨앗도서관(MSC Library for Kids)
씨앗도서관으로 오는 홍보용 책자들을 요 근래 몇 가지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린이들에게 책이 필요하다면 왜 굳이 도서관을 그만두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승주목사 혼자서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것이 시간으로나 비용 면에서나 버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해 놓으면 언제나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것을 사역가운데 자주 체험하였습니다. 도서관은 대출은 하지 않고 어린이들에게 꼭 필요한 신간들을 중심으로 비치해 두고 개방시간에 와서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신간도서는 기증을 받거나 교회 예산에서 한 두 권의 책을 매달 새로 구입하는 형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독서 지도사를 초빙하는 일도 생각하고 있지만 교회의 형편에 맞추어 하려고 합니다. 도서관은 어린이들의 견문을 넓히고 그들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치유하고 호기심을 채워주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어린이들의 학업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 지역에 꼭 필요한 사역입니다. 또 기독교 서적도 함께 비치하여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를 익히고, 복음도 듣도록 하는 사역을 하려고 합니다. 씨앗 도서관의 소망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지적인 어린이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와 나라의 지도자들이 되어서 훌륭하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해 나가는 크리스찬 리더들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장학생선발육성(English Scholar Program)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연구하는 것 외에 제가 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 분야가 있다면 영어입니다. 지금은 네이티브들과 만나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신학적인 토론이 가능한 정도입니다. 인터넷설교를 듣고 영화를 볼 때에 대체로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읽는 것도 웹사이트를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와도 같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인재를 키우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실력을 주셨고, 그것을 향상시킬 기회를 주셨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나의 이 영어를 아는 지식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이 실력있는 인재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 영어 장학생 선발 육성 프로그램(English Scholar Program)의 목적입니다. 또한 돈만 내면 가서 배우는 학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사기를 증진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포로의 몸이었으나 실력 있는 인재였을 때에 왕의 인정을 받고 그를 위하여 쓰임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청소년들이 빈부를 떠나 실력을 갖추었을 때에 자신의 세대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
전도하기 위하여서 담임자인 저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한 순간도 이일을 위하여서 마음이 편한 적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어릴 때에 신정감리교회(경기연회 평택지방)에서 여름성경학교 기간에 담임선생님과 성경학교에 오라고 전도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에 극성스런 친구들 때문에 믿지 않는 어린이들과 싸움이 벌어진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전도는 나의 신앙생활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는데, 인천제일교회(중부연회 구월지방)에서 사역하면서 주력하던 사역이 바로 전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못한다는 말을 이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곳 신월동에 와 보니, 교회들이 전도도 열심히 하고, 정말 큰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들의 사역도 아주 분주하게 열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뜨겁고 살아있는 교회들인 것을 알 수 있는 전단지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러한 교회들 속에서 나도 합세하여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은 전도를 하되 꼭 우리교회로 오라는 전도가 아니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믿다가 낙심한 이라면 자기의 본 교회를 나가도록 하고, 또 가까운 교회로 나가도록 하고, 그래도 우리교회에 오고 싶을 때에 초대하는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 나가는 믿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격려하고 반가워하는 전도자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인천제일교회에는 전도대장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이영순집사님과 이미숙권사님의 전도가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을 매일 찾아가 만나고 욕을 먹어도 웃고 사랑해 주고, 정말로 그들의 삶을 돌보고 섬기는 그분들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당장에 그런 모습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아직은 역효과를 두려워하여 적극적인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과 같은 전도를 하려고 기도중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보내시고 주의 종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줄 기도의 동역자들을 많이 세우셨으면 합니다. 오! 주님, 부족한 종을 도우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의 열정과 사역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본문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행18:23~21:16). 바울은 드로아에서 함께 갔던 이들과 헤어져 앗소까지 32Km를 혼자 걸어서 여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일행들과 앗소에서 합류했습니다. 미둘레네, 기오, 사모라는 곳을 거쳐서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입니다.
장로들에게 한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겸손과 눈물과 인내의 사람이며, 복음전파를 위하여 용기와 열정이 있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사심이 없고 사랑과 긍휼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명자로서 유대인의 박해 속에서도 힘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예루살렘에는 박해가 기다리는 있는 것을 자꾸만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환난이나 박해가 기다린다 하더라도 그는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려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예루살렘에 가서 큰 고통을 당할 것이지만 에베소 교회에게도 배교의 위험이 있는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한 환난을 이기기 위하여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돌보라는 당부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나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나 이 사실을 알고도 믿음의 길을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으며,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히 그 현실에 맞닥뜨립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로 헌신한 자의 언어들이 그의 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이 고백은 사도바울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아멘.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매일 매 순간 교회 부흥을 위한 수많은 아이이어들이 떠오르고, 또 그 아이디어들을 뒷받침하는 전략들이 떠오릅니다. 예배드리러 강단에 올라가면 예배당 전체가 눈에 들어오고, 가구배치를 위한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사실, 겨자씨 교회에 부임한 후로 이마에 내 천(川)자가 더 또렷해졌습니다. 수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만 혼자 힘으로 이모든 생각들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과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감 당 하 기 어 려 운”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열정을 다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질문해 봅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전도를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행의 결과가 때로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일 수 있습니다. 전도한다고 하면서 복음은 전하지 않고 교회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전도하다보면, 선물을 거절하거나 얼굴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몇 번 기분 좋지 않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아이들에게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정말 반가워”라고 말해줄 때 그 아이들이 웃으며 밝아지는 것을 수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내일 꼭 자기 교회에 나가세요”할 때 아이들이 격려 받은 표정으로 당당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을 드리면, ‘저 교회 다녀요’ 하면서 어색한 표정을 짓는데, 그들도 반겨주고 격려할 때 좋은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교회는 달라도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교류하고 함께 도와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는 것과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의 도리입니다. 가장 우선해서 힘써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귀한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도록 우리 겨자씨교회는 날마다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목사로서의 생명과 교회의 생존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할 것을 선포합니다.
설교 후 기도
오! 주여 주의 일꾼들을 보내시고 함께 동역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되는 우리 겨자씨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153-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본문: 행20:17~24
목적: 성도들이 사도바울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나라를 위한 열심을 낸다.
흐름: 지역민을위한음악회/어린이+청소년비전클럽/어린이공부방/씨앗도서관/영어장학생선발육성/전도/사도바울의열정과사역/무엇을위한열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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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을 위한 음악회
옆에 계신 분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우리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하여 실행하고자 하는 몇 가지 일중에서 하나인 음악회를 위해서 이곳저곳에 전화하고 인터넷을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좋은 공연들을 기획할 수 있는 연주자들도 많았고 단체들도 있었습니다. 단지 우리 교회가 그분들을 모시기에는 형편에 맞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적자원과 관련하여 아쉬웠던 점은 제가 알고 있는 이들 중에서 음악을 하면서 그것으로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혹 음악을 하시는 분들은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찾아 충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계획하기로는 20~30명 정도의 어린이들과 성인들이 우리 음악회에 초대될 수 있는데 행사 기획비는 적어도 50여만 원이 최소가 된다는 점이 어려움 중 하나였습니다. 1인당 약 2만 원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가치가 있을까 하는 점에서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연중 음악회를 개최하는 횟수를 줄여서라도 어떻게든 양질의 공연을 우리교회에서, 더 중요하게는 우리 지역에서 개최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때때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연과 음악회를 여는 목적은 순전히 지역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접하고 그들의 삶을 순화시키기를 바라고, 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한 가지 목적이 더 있다면 그것은 지역의 사람들이 우리 겨자씨교회를 자꾸만 들어와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턱을 낮추어서 예수 믿지 않는 이들도 드나들 수 있는 친근한 공간으로 개방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누구나 사랑하셔서 믿는 자들에게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이+청소년비전클럽
우리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하여 비전클럽을 운영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먼저 시작할 때에는 어린이에게 중점을 두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나중에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 늘어나면 그 때는 청소년들에게도 눈을 돌려서 그들도 돌보려고 합니다. 어린이 비전클럽은 어린이 회원을 100명 내 외로 받습니다. 회비는 무료이며 어린이들의 신상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그들을 지도합니다. 일 년에 1~2회 공연관람을 갑니다. 또 1~2회 견학이나 소풍, 운동회를 합니다. 어린이들의 생일파티를 무료로 해 줍니다. 어린이들의 어려움이나 고민을 들어주고 기도해줍니다. 어린이 비전클럽은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꿈과 희망을 품고 자라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이들의 소중함을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5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장
미래의 세대들을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정신으로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저는 지난 몇 십여 년의 사역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겨자씨교회에는 위하여 기도하고 심방할 성인 성도들이 많지 않습니다. 위기를 기회를 만들라는 말대로 겨자씨교회에 성인들이 많지 않지만 그것에 실망하지 말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체험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겨자씨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보배와 같이 여깁니다. 그들에게는 이 나라 이 민족과 세계의 미래가 심겨져 있는 것을 믿으시고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공부방
어린이공부방은 엠에스씨 키즈 비전 센타 MSC Vision Center for Kids 라는 명칭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통해서 어린이들의 심성과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을 삶 속에서 돕고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주님께 나아와 기도 받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주님께 나아오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9:13~14).
겨자씨교회에 부임하면서 담임자인 저는 성인들을 위한 목회를 위한 노력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면서, 그리고 길 밖에 나가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만나면서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유는 지역의 환경이 어린이 친화적 환경이 아닙니다. 아니 주민들에게 살기 아주 힘든 환경입니다. 공원도 충분하지 않고 어린이들이 눈 돌릴 곳이 그리 마땅하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교회는 교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의자들을 치우고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이일을 위해서는 새에덴 교회의 부교역자 장성철목사님이 그 시작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 가장 힘없는 자를 위한 사역에 그 중심을 둘것입니다. 가끔은 2년 내에, 3년 내에 자립교회가 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도 밀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우리 겨자씨교회의 사역을 이끌어 가실 것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립니다.
씨앗도서관(MSC Library for Kids)
씨앗도서관으로 오는 홍보용 책자들을 요 근래 몇 가지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된 것은 어린이들에게 책이 필요하다면 왜 굳이 도서관을 그만두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승주목사 혼자서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것이 시간으로나 비용 면에서나 버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해 놓으면 언제나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것을 사역가운데 자주 체험하였습니다. 도서관은 대출은 하지 않고 어린이들에게 꼭 필요한 신간들을 중심으로 비치해 두고 개방시간에 와서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신간도서는 기증을 받거나 교회 예산에서 한 두 권의 책을 매달 새로 구입하는 형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독서 지도사를 초빙하는 일도 생각하고 있지만 교회의 형편에 맞추어 하려고 합니다. 도서관은 어린이들의 견문을 넓히고 그들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치유하고 호기심을 채워주고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어린이들의 학업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 지역에 꼭 필요한 사역입니다. 또 기독교 서적도 함께 비치하여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를 익히고, 복음도 듣도록 하는 사역을 하려고 합니다. 씨앗 도서관의 소망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지적인 어린이들이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와 나라의 지도자들이 되어서 훌륭하게 자기의 역할을 감당해 나가는 크리스찬 리더들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장학생선발육성(English Scholar Program)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연구하는 것 외에 제가 제 인생의 많은 시간을 투자한 분야가 있다면 영어입니다. 지금은 네이티브들과 만나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신학적인 토론이 가능한 정도입니다. 인터넷설교를 듣고 영화를 볼 때에 대체로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읽는 것도 웹사이트를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한국에서 영어를 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와도 같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인재를 키우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실력을 주셨고, 그것을 향상시킬 기회를 주셨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나의 이 영어를 아는 지식을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서 그들이 실력있는 인재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 영어 장학생 선발 육성 프로그램(English Scholar Program)의 목적입니다. 또한 돈만 내면 가서 배우는 학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사기를 증진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포로의 몸이었으나 실력 있는 인재였을 때에 왕의 인정을 받고 그를 위하여 쓰임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청소년들이 빈부를 떠나 실력을 갖추었을 때에 자신의 세대에서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전도
전도하기 위하여서 담임자인 저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한 순간도 이일을 위하여서 마음이 편한 적이 없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어릴 때에 신정감리교회(경기연회 평택지방)에서 여름성경학교 기간에 담임선생님과 성경학교에 오라고 전도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에 극성스런 친구들 때문에 믿지 않는 어린이들과 싸움이 벌어진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전도는 나의 신앙생활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는데, 인천제일교회(중부연회 구월지방)에서 사역하면서 주력하던 사역이 바로 전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를 못한다는 말을 이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곳 신월동에 와 보니, 교회들이 전도도 열심히 하고, 정말 큰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들의 사역도 아주 분주하게 열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뜨겁고 살아있는 교회들인 것을 알 수 있는 전단지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러한 교회들 속에서 나도 합세하여 전도지를 들고 나가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은 전도를 하되 꼭 우리교회로 오라는 전도가 아니라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믿다가 낙심한 이라면 자기의 본 교회를 나가도록 하고, 또 가까운 교회로 나가도록 하고, 그래도 우리교회에 오고 싶을 때에 초대하는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 나가는 믿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격려하고 반가워하는 전도자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인천제일교회에는 전도대장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이영순집사님과 이미숙권사님의 전도가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을 매일 찾아가 만나고 욕을 먹어도 웃고 사랑해 주고, 정말로 그들의 삶을 돌보고 섬기는 그분들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당장에 그런 모습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아직은 역효과를 두려워하여 적극적인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과 같은 전도를 하려고 기도중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보내시고 주의 종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줄 기도의 동역자들을 많이 세우셨으면 합니다. 오! 주님, 부족한 종을 도우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모든 사역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사도 바울의 열정과 사역
“24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오늘 본문은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행18:23~21:16). 바울은 드로아에서 함께 갔던 이들과 헤어져 앗소까지 32Km를 혼자 걸어서 여행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일행들과 앗소에서 합류했습니다. 미둘레네, 기오, 사모라는 곳을 거쳐서 밀레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이렇게 한 것입니다.
장로들에게 한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바울이 겸손과 눈물과 인내의 사람이며, 복음전파를 위하여 용기와 열정이 있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사심이 없고 사랑과 긍휼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명자로서 유대인의 박해 속에서도 힘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서 오순절 절기를 지키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예루살렘에는 박해가 기다리는 있는 것을 자꾸만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환난이나 박해가 기다린다 하더라도 그는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려는 결심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예루살렘에 가서 큰 고통을 당할 것이지만 에베소 교회에게도 배교의 위험이 있는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한 환난을 이기기 위하여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돌보라는 당부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나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나 이 사실을 알고도 믿음의 길을 지킬 뿐 아니라,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으며,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대히 그 현실에 맞닥뜨립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로 헌신한 자의 언어들이 그의 입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이 고백은 사도바울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아멘.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매일 매 순간 교회 부흥을 위한 수많은 아이이어들이 떠오르고, 또 그 아이디어들을 뒷받침하는 전략들이 떠오릅니다. 예배드리러 강단에 올라가면 예배당 전체가 눈에 들어오고, 가구배치를 위한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사실, 겨자씨 교회에 부임한 후로 이마에 내 천(川)자가 더 또렷해졌습니다. 수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만 혼자 힘으로 이모든 생각들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과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에 “감 당 하 기 어 려 운”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열정을 다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질문해 봅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전도를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행의 결과가 때로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것일 수 있습니다. 전도한다고 하면서 복음은 전하지 않고 교회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전도하다보면, 선물을 거절하거나 얼굴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른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몇 번 기분 좋지 않은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아이들에게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면 정말 반가워”라고 말해줄 때 그 아이들이 웃으며 밝아지는 것을 수차례 경험하였습니다. “내일 꼭 자기 교회에 나가세요”할 때 아이들이 격려 받은 표정으로 당당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을 드리면, ‘저 교회 다녀요’ 하면서 어색한 표정을 짓는데, 그들도 반겨주고 격려할 때 좋은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교회는 달라도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이 교류하고 함께 도와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는 것과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의 도리입니다. 가장 우선해서 힘써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귀한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목적으로 하지 않도록 우리 겨자씨교회는 날마다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목사로서의 생명과 교회의 생존까지도 주님께 맡기고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할 것을 선포합니다.
설교 후 기도
오! 주여 주의 일꾼들을 보내시고 함께 동역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 되는 우리 겨자씨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153-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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