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
본문: 누가복음 22장 39-46절 열왕기상19장 1-19절
목적: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신들을 향하신 뜻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
흐름: 엘리야의부르짖음/세례요한이갇히다/예수님의 기도/사도바울의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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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을 살아온 것이 우리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셨다는 기쁨으로 충만하신 분들만 하나님께 손을 높이 들어 박수하시며 영광 돌려드립니다. 할렐루야!
지난 토요일에는 한가지 소식을 접하고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 기사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부모 없이 홀로 국경을 넘은 다섯 살배기 탈북 아이가 한국에 온 지 2년 만에 탈북자 지위를 인정받게 됐다. 아이의 어머니는 함께 탈북을 하다 중국 공안당국에 적발돼 어머니만 다시 북송되는 눈물의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이경구 부장판사)는 24일 탈북 소년 황모군(5)이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낸 북한이탈주민인정거부처분취소소송에서 "국가는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온갖 위기를 넘기며 한국에 도착한 뒤에도 출생지가 중국이라는 이유로 탈북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황군은 이번 판결로 보금자리를 갖게 됐다.
황군의 어머니 김모씨(37)는 2002년 생활고 때문에 탈북해 중국에서 황군을 낳았다. 당시 동거 중이었던 중국 남성은 모자를 거리로 내쳤다. 결국 황군은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어머니와 함께 강제북송됐고 두 달여간 수용소에서 지냈다. 출소한 뒤 2004년 3월 황군의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다시 탈북했다.
이후 황군의 어머니는 2006년 3월 배를 타고 아들과 한국으로 향하던 중 중국공안에게 발각됐다. 황군만은 지키고 싶었던 어머니는 공안에게 "이 아이는 동거하던 중국인의 아들"이라고 거짓 주장하며 중국에서 살고 있던 친척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두고 혼자 북송당했다.
이후 황군은 중국에 있는 어머니의 지인 손에 맡겨졌지만 주차장에 버려지는 등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러다 먼저 탈북에 성공한 황군의 이모들은 수소문 끝에 아이를 찾아냈고, 황군을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황군은 중국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가슴에 지닌 채 소수의 탈북자들 틈에 끼어 2006년 8월 중국에서 몽골을 거쳐 간신히 한국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부는 "황군은 어머니 김씨가 중국 남성과 동거하던 중 낳은 아이이므로 북한 이탈주민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황군이 지니고 있던 쪽지에 아버지가 중국 남성으로 표기된 것도 거부 이유가 됐다. 이 때문에 황군은 한국 내 이모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무적자 신분이 돼 유치원에도 못 가고 건강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재판부는 "황군은 김씨가 북한의 남편 황씨와의 법적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 태어나 민법상 황씨의 아들이라는 점이 인정되고 아버지를 중국인으로 적은 것도 강제북송을 면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며 "황군을 탈북자로 인정하라"고 판결했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의 동포들이 당하고 살아야할 모진 고통이 저의 심장을 찌르는 듯했고, 아이의 눈빛이 아른 거리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랄 나이에 이미 어른도 견디어 내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양천지방 어린이들은 좋은 옷을 입고 잘 꾸며진 무대 웨에서 찬양대회를 하는데, 저 북녘의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호화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릅니다. 탈북민들에게 주는 국가의 혜택을 받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고 그 아이가 자라서 이 민족을 위하여, 특히 북녘의 동포들을 위하여 더 많이 쓰임받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뇌리를 스치는 것은 탈북민들에게 주는 혜택을 노숙자들에게는 주지 않는가 하는 의문점이었습니다. 그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버려진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돌보는 노력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국가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또는 교회가 돌보는 가를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며, 부당하게 그 혜택이 그들을 빗겨간다면 오늘 이 기사에서 보았던 5세의 어린이와 같이 다시 검토하도록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빌립보서 1장 18절의 말씀에 의지하여 행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 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라는 자성적 질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따르기 위해서는 가시밭길을 자처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하나님은 풍요의 신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풍요를 주시기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바른 인간관계를 먼저 맺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계십니까? 엘리야와 세례요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경우를 짚어가면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숨겨진 뜻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의 부르짖음
엘리야는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비로 받아들인 아합의 통치 시대에 활동하였던 예언자입니다. 당시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에 그 패역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숭배를 이스라엘에게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사마리아에 바알의 사당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의 수만 850명이나 되었습니다(왕상17장, 18장).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가뭄을 내리실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또 3년 후에 갈멜산에서 이방신의 선지자들 850명과 대결하여 하나님만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이방의 선지자들을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 후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름으로 인하여 가뭄이 해갈되는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리고 아합 왕에게 엘리야가 보여준 이적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리고 왕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믿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아합왕의 옆에는 그를 패역한 자로 만드는 왕비,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이세벨의 엘리야를 향한 독설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배림이 마땅하니라” (왕상19:2)
너무나 확실하게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지만 불신의 이세벨에게는 그의 행한 일이 되갚아 주어야 할 망령된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하였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어떤 때는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왕상18:42)”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었는데, 단 한 사람, 이세벨 왕비로 인하여 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9장 4절과 같이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일의 되어진 결과에 따라 자기의 영광을 취하고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선포하고 이룬 일들로 인하여,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권력자로부터 미움을 받고, 그래서 백성들도 덩달아 그를 멸시하는 그 상황을 견디어 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가 한탄하며 그의 목숨을 거두실 것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응답을 주셨습니다. 하나의 응답은 아주 즉각적인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로뎀나무아래 잠들어 누운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위로하게 하셨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여 다시 사십 주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또 거기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새로운 시대의 인물들에게 기름 부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아람 왕으로 하사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후를,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대신하는 사명을 주기 위하여 기름 붓게 하셨습니다.(왕상19장) 그 일의 목적은 왕상 19장 17절 이하에서 드러납니다.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사야의 불평이 되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며 그가 속한 그 땅에서 자기가 당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으로 인한 화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평하는 입이 그 소리를 멈출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어려워서, ‘하나님 저를 천국으로 지금 데려가십시오’ 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여러분이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여러분을 위하여 중보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가장 큰 중보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신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로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례요한이 갇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엘리사벳에게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은 것입니다. 요한의 탄생 역시 예수님의 탄생 때와 같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사야 40장 3절을 인용하면서 요한을 메시아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해 미리 보내신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태3:3)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천국의 도래를 알리는 회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강력한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자기에게 세례 받기 위해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똑바로 살아라’하는 독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끝내 죽임을 당한 것은 그의 복음 선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백성들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것을 주장하였는데, 헤롯왕이 수치스럽게도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삼은 것이 옳지 않다고 직언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은 헤롯왕 뿐 아니라 헤로디아에게도 싫은 소리였기에 결국 옥에 갇히고 마침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그는 스스로도 자기는 이 세상의 빛으로 온 사람이 아니고 그를 위하여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그와 같은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였을 때에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이아니라 냄새나고 수치로 들끓는 감옥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는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갔고 조용히 마쳤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그의 이름도 증거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매일 축제이고, 매일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생활을 너무 행복과 연관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즐겁고 영광만 있다면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하여질수록 하나님께서는 더 무거운 사명, 더 중요한 사명을 맡기시는데,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매일 행복을 추구하는 삶과는 다른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일을 예로 든다면, 아버지와 남편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즐겁습니까?” 그 때 어떤 사람의 대답은 “예, 저는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아버지와 남편의 역할은 전혀 감당하지 않은 채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여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대답은 “매일 즐겁고, 매일 행복하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내 삶에는 보람이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이 그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어 외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그들을 사랑하기에 보람있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여러분이 육체적으로 고단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또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시댁과 친정에도 자주 찾아뵙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 때문에 마음과 육체가 모두 피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일 때에 저와 여러분은 감당해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힘이 된다고 할 때에 고난도 기뻐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동방박사로부터 탄생을 축하하는 경배를 받으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평범한 삶을 30년간 사셨습니다. “23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마태2장. 나사렛이라는 시골마을에서 자라시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죄로 인해 삶이 불안한 사람들을 경험하셨습니다. 평범한 유대의 소년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평범한 시간들을 비범하게 보내신 것입니다. 나중에 갈릴리 회당과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에도 그의 지혜로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오늘 기도하시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셨는데, 사람들은 그를 믿으려하지 않고 요한복음에 보면 그를 괴롭히는 질문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너무나 차가운 불신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을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행하는 그 행함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요14:11). 이렇게 사람들의 불신의 벽은 높았고 그를 따르는 대중도 한 순간에 환란이 오면 그를 떠나갈 터였습니다.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큰 호흡이 필요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기도를 돕기 위하여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올 정도였습니다(43절). 성경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44절)”고 기록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양천지방여선교회주최로 ‘이웃 사랑 나눔 예술제’를 열었는데 그날 초대된 게스트가 수화로 뮤지컬을 하는 단체였습니다. 공연은 두 가지로 진행되었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다룬 ‘마리아, 마리아’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생애를 그린 ‘Jesus, Jesus' 가 공연되었습니다. ‘Jesus, Jesus’의 장면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그에게 애걸하기를 왜 당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주님이 이적을 행하시지 않고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항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심경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고 군대마귀를 내쫒으시던 예수님의 능력으로 능히 세상의 권력, 로마의 권력도 이기실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이 모진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신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큰 사랑의 역사는 인간적인, 가벼운, 감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정의가 그 안에 바로 세워지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기 위하여 정확한 규칙을 정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였을 때에 드는 사랑의 매와도 같은 정의를 세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네가 용서 받았노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친히 능욕을 당하시고 고통당하신 것입니다. 죽으시기 까지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희생하신 예수님 앞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왜 내 부동산이 손해를 보고, 왜 내 자녀가 해를 당하고, 왜 내 배우자가 한눈을 팔고, 가정이 어려움을 겪는가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까? 그런 모든 생활의 일들은 작은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그 모든 왜곡된 관계는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특히 여러분의 재산의 문제로 고통당할 때에, 스스로를 돌아보아 자신의 모습, 자신의 물질을 사용하고 소유하는 그 방식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가를 돌아보며 아닐 때에는 회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십시오. 마음에 감동으로 주시는 생각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실 때에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명심할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광만을 추구할 때에 여러분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멀어진 사람은 한 두 번은 하나님의 복 주심을 체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구원의 예수님을 붙잡으십시오. 그의 고난의 깊이를 묵상하시고 세상을 향하여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자를 찾으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대답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변명-내가 선 곳은 어디입니까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신봉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그 때도 사도가 되기 전의 바울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던 중 이었습니다-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운 좋은 사람보다 억 만 배나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주신 것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의 말씀을 들었으므로 자기의 잘못된 길을 버리고 예수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같이 그는 천국의 복음을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셨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자기의 갇힌 것이 복음전파를 위하여 도움이 되었다면서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빌1:12-13). 이것은 감옥에 갇히는 일이 복음전파에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어느 상황에 처하든지 감사하기를 배운 자의 반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감사하고 그 곳에서 자기가 꼭 해야 할 일들을 찾아 성실히 일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었던 그 교훈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매일 만나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내 것을 모아두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그 사랑을 믿는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 곳은 어디입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성장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앞을 내다보고 좋은 계획을 세우려 해도 좋은 전망이 없습니까? 이 일을 여러분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선 곳에 임재하십니다. 천사를 통해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먹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통스럽고 외로원 기도의 자리에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아멘.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우리의 선 자리, 나의 현재를 부정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뜻하셔서 보내시고 세워주신 자리에서 더욱 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난도 이기게 하옵소서. 더 크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소원하게 하시고 깨달은 바를 이루어드리는 아름다운 주의 자녀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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