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본문: 요4:23-24
목적: 성도들이 예배의 신성함을 깨닫고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흐름: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기/ 십자가 그늘 아래 선 우리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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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인정하기
할렐루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또 지금도 죄의 길로 기울어지는 우리들을 고쳐 세우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우리의 삶이 온전하여 지지 못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시편 34편 4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오늘 여러분을 향한 처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아갑니까?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어떤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까?
겨자씨교회로 임지를 옮기면서 저의 삶에서는 성과 속의 공간과 시간의 구별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예배당 안에 저의 서재가 꾸며졌고 바로 문하나만 열면 예배당과 연결되는 숙소에서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잠도 잘 안 오고 예배당을 지나다니는 것 때문에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예배당이라는 공간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기도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달 남짓, 이곳에서 생활하고 보니 오히려 이곳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되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기쁨이 넘칩니다. 시편 15편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열망하는 자가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승주목사는 하나님의 장막에 머무르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부러우시면 철야기도 준비하시고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찬송하며 말씀 보며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은 세속적인 직장과 교회가 아닌 일반 가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과 만나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승주목사가 겨자씨교회에 오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 목사를 멀리하시다가 겨자씨교회에 와서는 교회에서 생활을 하니까 가까이 해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태초부터 저와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잘 아시지요. 그 찬양에서 말하는 사랑은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태초부터 오는 것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가 그 부분을 함께 불러보도록 합니다.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살아갑니까? 그것은 말 그대로 무신경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욕구에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9장 43절에서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자기의 경건상태를 항상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기위하여 깨어있는 동안 매 시간 마다 자기의 경건상태를 기록하였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존 웨슬리 목사님은 자신이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관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지를 발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웨슬리의 삶과 닮은 점이 있습니까?
미국 침례교회 소속으로 이승주목사에게 복음적 관심에 있어서 큰 공감을 일으키고 있는 목사님이 있는데 그 분은 바로 다름 아닌, 폴 워셔(Paul Washer)입니다. “그 길(신앙의길)이 좁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렸다We Have Forgotten that the Way is Narrow.” 는 설교(True Disciple Conference 2007. in KS, USA. Session 7.)에서 평범한 미국의 침례교인들이 다 지옥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일생이 한 번, 아니면 몇 번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만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기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 들어갈 것처럼 믿는 데 그것이 그들의 죄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여기서 교리적으로 인간의 노력에 의한 구원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워셔 목사가 지적하려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됨이 없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하신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도 사기치고, 예수 믿고도 남의 돈 갚지 않고, 예수 믿고도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는 잘못된 생활 습관에 젖어 있다면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 믿은 후에도,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이 생긴 후에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22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누웠다는 말이”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선포하면서 좁은길로 가라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좁은 길로 가지 않고 있다면 그들은 잘못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고 깨어있지는 못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방향을 체크해야 합니다. 세 걸음 갔다가 한 걸음 물러서면 우리는 결국 두 걸음 앞으로 하나님께 다가간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곁에 머무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15편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십자가 그늘 아래 선 우리들
예수 믿는 자의 복은 무엇입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 아래 우리가 거한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415(471장)입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 없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이 외의 다른 무엇을 여러분은 원하십니까? 예수 믿기 전까지 여러분을 얽어매고, 부자유하게 했던 것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자유하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전에는 내가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만큼 위하던 것들도 십자가 아래서는 그 빛이 바랜 것을 발견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재물과, 명예와, 꿈과, 이상이 우리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은 하나님께 이러한 깨달음과 변화가 오도록 기도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목숨까지도 미워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그 희생이 감사하여서 사랑의 마음이 불 일 듯한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에 머물러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법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세상의 법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버린 지 오래입니다. 사도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서도 터져나오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4장 “7우리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세상의 종 되었고, 죄의 종 되었던 여러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되신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
미국의 공업도시, 그래서 환경이 사람에게 잔인하게 척박한 곳, 가난이 들끓는 곳,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7살 먹은 소년 하나가 은행을 털다가 잡혔습니다. 그 때 그가 왜 은행털이범이 되었는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먼저는 자기가 은행털이에 성공하면 그 돈을 가지고 달아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은행에 들어갔고,
둘째는 혹시 자기 계획이 뒤틀려 잡힌다 해도 감옥에 가면 하루 세끼 식사를 할 수 있으니 그랬고,
마지막으로는 만약 경찰이 쏜 총에 맞는 다고 하여도 이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은행을 털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소년이 말해준 세 가지 이유는 너무나 절박한, 도움의 손길로부터 완전히 소외 된 그의 삶을 처절하게 보여줍니다. 그 소년은 그의 소원대로 하루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왜 그 어린 소년이 자기의 꿈을 마음껏 펼쳐야 할 그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삶을 선택을 한 것입니까? 그를 돕는 자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의 빈궁함을 돌아보고 그를 먹이는 손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겨자씨교회에 부임해 오면서 이승주목사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람들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물로 목사로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기심 때문에 참된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겨자씨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이승주목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승주목사가 필요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느끼게 되었을까요?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좌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 이승주목사가 감당해야할 목회의 사역들은 너무나 많고 풍부합니다.
이 설교를 써내러가는 중에 육칠십 대의 아저씨 한 분이 찹쌀떡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 천 원에 그 떡을 사드리면서 미리 준비해둔 사과 한 개를 건네며 선물이라고 기분 좋게 드렸습니다. 예수 믿으시냐고 했더니 지금은 일이 바빠서 쉬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꼭 신앙생활 회복하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가 꼭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또 매 주일마다 찾아오시는 노숙자 한 분이 계신데, 지난주까지는 생각을 못하다가 이제 이번 주부터 실행하려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그분의 얼굴을 뵈니 피골이 상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오시면 구제비만 드릴 것이 아니라 약간의 과일과 음식을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오실 때마다 예수 이름으로 담대하게 축복기도를 해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그네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목회를 계속해서 해 나가려고 합니다.
얼마전 교회 바깥 계단을 청소하다가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는 중학생정도의 남자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깨가 처져있고 풀이 죽어있었습니다. 저를 보자 혼이 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런 아이들 하나에게라도 친절한 말을 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 주님!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여러분도 이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 드려지는 예배인가
고난 중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말할 수 없이 풍부합니다. 그 중에 한 가지는 하나님을 독차지 하는 은혜를 우리 주님이 저에게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예배드릴 때에, 특히 예배를 인도할 때에 저는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사람에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겨자씨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혼자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돕는 배우자를 아직 주시지 않은 것은 이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나 봅니다.
찬양 인도 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이의 언어가 어떠해야 할까요? 예배를 인도하는 이는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여 그의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 사람의 언어는 사령관과 같이 지시적이어서도 안 되며, 아나운서나 나레이터와 같이 전달에만 치중하여도 안 됩니다. 인도자의 언어는 하나님과 회중이 함께 대화하도록 초대하는 언어를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 혼자 하나님께 도달하는 그리스 정교회적 독백이 아니라 회중도 함께 그 대화에 이끌어 들이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중을 대표하여 고백과, 결단과,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언어가 인도자에게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보다는 “오, 하나님, 주의 자녀들이 다 주 앞에 나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사오니 우리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 속에 임재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요한복음 4장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예배를 받으시되 여러분이 자신의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에 받으시는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가 바클레이는 이 본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짓 예배란 미신적인 예배이다. 이것은 어떤 필요 의식에서나 어떤 실재적인 갈망 때문에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근본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이다....그러나 참된 종교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에 감사하는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는 그 갈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진실하고 참된 예배는 사람이 자기의 영(spirit)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친교를 이룰 수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어떤 분은 한국교회가 예배 중독증에 걸려있다고 평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은 일주일에 한 번의 예배면 족하다고 여기고 여러 가지 제목이 걸려있는 예배, 즉 결혼축하예배, 돌예배 등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이 분의 비판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관심은 사람에게 있고 사람의 영광을 위하면서, 그 회합을 예배라는 형식으로 진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진정한 감사와 감격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향하여 살아가야 하는 데 그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매순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식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돌아볼 때에 어떤 때 에드리는 예배들에서 우리들은 예배 속에서 조차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야기들과 인간의 열망들과 인간의 영광에 눈이 멀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대화할 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까하는 관심이 예배 중에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특히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오직 하나님께만 여러분의 정성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듣게 하시고, 왜 내 한 주일의 삶 속에서 이러 저러한 일들을 겪게 되었는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를 부르셔서 예배 속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품고계신 소원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깊이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예배를 받아주시고 그 영광을 취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찬송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우리 삶의 기쁨이 됩니다. 매일의 삶이 예배 되게 하옵소서. 예배드릴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들이 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겨자씨감리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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