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나를 따르라 081019 겨자씨감리교회 이승주목사

제목: 나를 따르라
본문: 요12:23-26
목적: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뒤따른다.
흐름: 부귀를 따르는 삶/쾌락을 따르는 삶/정의를 따르는 삶/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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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박수 올려 드립니다. 할렐루야!

부귀를 따르는 삶
사람들은 흔히 부를 추구하고 그 부를 통하여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아주 놀랄만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선출될 가능성이 수치상으로 높은 것을 우리가 뉴스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선거운동 초기에는 공화당후보인 맥케인 후보가 민주당 후보 오바마를 지지도에서 앞서고 있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업체가 운영난으로 파산하게 되면서 미국과 세계의 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실패로 경기가 둔화되고 고용이 줄며, 모기지 이자율이 치솟는 등 미국경제에 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국과 세계경제의 원리가 되었던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사람들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뒤를 잇는 주자로 보이는 맥케인 후보는 지금 모든 미 국민이 보는 앞에서 실패자가 된 부시 대통령의 분신 외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정책면에서도 오바마 후보의 정책이 경제를 일으키고 힘없고 돈 없는 이들에게 작은 희망이나마 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대중은 명분보다는 자신들의 실리 면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경제에 실패할 것 같은 맥케인 후보 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열 것으로 보이는 오바마후보를 더 지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측면들은 생략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보았을 때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의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할리우드 영화중에 시드니 화이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속에는 다양한 괴짜 캐릭터들이 있는데 그 중에 테런스라는 졸업생이 있습니다. 그는 그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자기만의 연구를 위해 학교에 몇 년간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색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함께 지내는 룸메이트조차 그가 관심하며 연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서 그가 박수를 받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순간이 있습니다. 말쑥한 차림을 한 테런스가 멋진 스포츠카에서 내리는 데 한 눈에 보기에도 그에게 엄청난 변화가 있는 듯했습니다. 룸메이트들이 의아한 눈길을 보내자 테런스는 자기의 연구하던 예측이론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계속 의아한 눈길을 보냅니다. 그제야 테런스가 자기의 예측이론을 한 인터넷 회사에 10만 달러에 팔았다고 이야기하니 룸메이트들이 신이 나서 축하를 하고 부러워합니다. 이것은 이 영화의 주된 장면이 아닌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덧붙여진 것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충분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이루었다고 할 때에 물질은 그것을 말해주는 척도가 됩니다. 흔히 하는 우스갯말로 티코를 가지고 고급 호텔에 진입하려 했으나 자꾸만 밖으로 돌리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음식점엘 가더라도 좋은 차를 가지고 가면 더 대접이 좋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돈의 적고 많음에 따라서 좋은 대우를 받거나 아니면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고 느끼기에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을 따르는 삶이 좋다고 하고 한 번 그것을 위해 살아봅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열심히 일하여 아주 많은 물질을 벌어들입니다. 때로는 사기꾼도 만나고 때로는 스스로 우매하여서 실패하기도 하지만 물질을 벌어들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자가 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처럼 생각하고 부자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듣자하니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돈을 쓰기 전에 일 곱 번 생각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돈을 쓸 일이 줄어들어 자기 가진 것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부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소비는 줄여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마트에 갔는데 필요한 목록을 적어간 것 외에 아주 싸게 파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무시해야 합니다. 그런 소비를 하는 분들은 분명 부자는 아니더라도 빚을 지고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다가 내가 하나님 앞에 이러저러하게 드려야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것은 은혜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번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였던 분량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아주 맛있는 과일이 생겨서 그것을 보자마자 누군가를 떠올리며 좀 나누어 주겠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좀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처음에 주려고 한 개수보다 적게 주고 싶어지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부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언가 달라고 할까봐 걱정합니다. 좋은 것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빼앗길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위해서 좋은 것은 다 모아 놓고 담도 높게 칩니다. 그 좋은 것들을 홀로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마음에는 형제도 없고 이웃도 없습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을 기억할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부자가 계시다면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가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도 비판하는 심정으로 선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비판에서 저 또한 자유롭지 않은 것을 이해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부자의 습성은 부자끼리 어울리게 합니다. 혹 가난한 사람이 그들의 틈에 있다 할지라도 결코 융합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어떻게 하면 더 얻을까 더 지킬까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일단 어느 정도의 부를 이룬 후에는 돈이 스스로 굴러들어오기 때문에 부자의 마인드-쥔 손을 펴지 않는-를 지켜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신 것입니다.

쾌락을 따르는 삶
사람들은 누구나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기적인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이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삽니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신월동의 사람들이 목동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신월동은 주로 주택이나 빌라가 많은데 경제적수준 상 남편들이 외도하는 경우가 적고 목동의 사람들은 주로 아파트 거주자들이 많은 데 각방을 쓰는 가정이 많다고 누군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도 될 수 있고 정확한 통계에 의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쾌락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은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유명인들 중에 섹스중독으로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 하루에 세 시간 이상 게임을 한다면 그는 중독증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알코올에 중독되고 마약에 중독이 된 이들이 자기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얼마만큼의 마약이 유포되고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미의 경우 마약의 피해자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마약중독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쾌락의 끝은 자기파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삼손은 얼마나 믿음직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였습니다. 그는 부모를 생각하여 꿀을 가져다가 부모에게 드릴정도의 효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삼손이라도 그가 쾌락을 따라 갔을 때에 그의 종말은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몇 번에 걸친 드릴라의 체포 작전에도 그는 그것을 장난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끝내 자기의 비밀을 누설 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드릴라의 사랑이라고 하는 달콤한 쾌락에 그가 빠져 있을 때에 그는 자기의 사명도 잊은 채 멸망의 길로 달려간 것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쾌락을 좇는 삶에서는 자기 인생을 망치고 마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전도서의 말씀입니다. “9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며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장


정의를 따르는 삶
어떤 사람들은 신념을 가지고 정의롭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지만 어느 누구도 정의로운 삶을 완전히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종과 성, 계층과 교육받음의 여부가 사람들의 상황을 매우 복잡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느 한 편에서는 피해자가 되지만 어느 한 편에서는 가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노동 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 박노해 시인은 평등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노력한 한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에 자기는 자기의 아내의 억압자이며 착취자인 것을 발견하였다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불을 꿰매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 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둔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장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의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하여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다른 이슈에 대하여는 유죄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위하여, 여성의 평등한 기회를 위하여 외치며 싸우는 중산층의 여성들은 계급갈등의 문제에서 중산층 남성과 같이 유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한 존경하는 선배가 계신데 그 분은 정의롭고 생각이 열린 분입니다. 그러나 남성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에 대한 인식을 하고 그것을 타파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적이고 정의의 이면에 있는 분노와 증오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저는 공산주의 이론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잠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한 동아리에 참여하였다가 그들이 공산주의의 계급투쟁을 주요 쟁점으로 삼아 미국의 흑인문제 외에도 제3세계의 나라들의 계급투쟁에 대한 논의들을 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정의를 세우는데 이제까지의 기득권층을 응징하고 벌주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복수에 대한 해결을 찾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한계입니다.
정의를 외치고 정의를 위하여 그들의 평생을 바치며 희생하는 분들을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보에도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의는 분노가 아니며-감리교신학대학에서 민중노래동아리 암하렛츠의 일원으로서 그 노래들을 사랑하였는데 때로는 노래를 부를 때에 까닭모를 분노가 내 속에서 치미는 것을 느끼곤 하였습니다-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승주목사가 뉴욕에서 느꼈던 충격은 뉴욕의 개혁적 지식인들-특히 기독교의-은 하나님의 자리에 정의를 모셔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라는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그래서 미침례교회와 같이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을 모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신앙의 대상도 마치 정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비판과 질타, 그리고 결국에는 분노와 경멸에 이르는 감정들이었음을 기억합니다. 그때에 이승주목사는 생터스 예배에서 고백했던 그 고백-사랑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정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를 따르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본문 23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거기 있던 유대인들은 아마도 예수님이 그들의 불멸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세력을 이기고 자기들의 나라를 다시 부강하게 세우는 “불패의 세계 제패자”로 오신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뒤엎고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승리의 꿈을 십자가의 비전으로 바꾸셨던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 멸시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을 영광의 자리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예수님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만을 붙들고 살아가면 그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상은 대단합니다. 어떤 지역이든지 가보게 되면 우선 그 지역을 이끌고 있는 큰 교회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 한국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습니까? 바로 복음을 들고 우리나라를 찾은 선교사들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온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 덕분입니다. 그들이 죽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든든히 서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희생한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게 된 것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거룩한 뜻을 위하여 한 사람의 목회자가 야심을 품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이영민전도사의 친구 전도사가 왔다가 이야기 하던 중 옛날에는 목회사역에 대하여 어떠한 야망을 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자기의 야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비전을 받아들일 때에 그를 통하여 많은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코스모 랑Cosmo Lang은 세속적 야망으로 불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 좋은 친구의 영향을 받아 세속적인 야심을 버리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가 영국 교회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던 시절에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중 “네가 필요하노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기의 야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린 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인 소원과 개인적인 야심을 버릴 때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야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버리시기 바랍니다.
“25절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바칠 때에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리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주의와 자기 안일에 빠져 있습니다. 인생의 분주함이 모두가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다른 이들의 필요에 대해서, 갈급함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안일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주님 앞에 경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셔서는 안 된다고 할 때에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자신의 이익과 안전, 출세를 포기하고 이 세계를 위하여 애쓰고 힘쓴 성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인생관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은 죽음으로만 가질 수 있고 그 생명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유지시키고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를 통하여 위대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가르치셨습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구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택합니까? 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이 복을 구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려면 그 방법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무리 굳어진 마음의 소유자라도 그 마음을 녹이고 변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을 위하여 썩어지고 죽어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믿음의 삶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명확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와 명예와 쾌락을 좇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으시기 바랍니다. 한 때 돌풍을 일으켰던 그 질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를 항상 자신에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설교 후 기도
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사모하게 하옵소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내가 처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위하여 내가 봉사하고 낮아지는 아름다운 삶의 주인공이 다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담임목사 이승주
158-831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전화 02)269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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