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ght and Life style
겨자씨교회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2012년 5월 17일 목요일
The Bible is not God. 120518
The Bible is not God, and it could be unacceptable in some point. Let it be! It is all of us who should listen to God in the guidance of the Bible. Besides church leaders have to show Christian public right path to be transformed in faith.
성서무오설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 "어떻게?"의 문제가 큰 짐으로 남는다. 성서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을 가진 독자의 몫이고 그 하나님 발견이 진정한 삶의 변화와 도약이 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명이 목회자, 신학자, 설교자에게 있다.
성서무오설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 "어떻게?"의 문제가 큰 짐으로 남는다. 성서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을 가진 독자의 몫이고 그 하나님 발견이 진정한 삶의 변화와 도약이 되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명이 목회자, 신학자, 설교자에게 있다.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Faith in Jesus Christ 120517
예수가 사람이며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은 오직 그의 삶에 근거 할 때만 참되게 이해된다.
The confession that Jesus was a true human and he is God only can be understood, based on what he said and did.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긍정이요 예수가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실 때에 그와 같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Claiming Jesus as the Son of God affirms that his earthly life was Godly and declaring Jesus as the Son of Man makes us imagine how God is with us in our suffering.
내 신앙의 경험으로는 그의 삶은 인간에 대한 긍정, 자유, 사랑이었다.
And then what his life was like I can say: it was full of acceptance, freedom, and love for humanity.
이 삶을 인정하는 것 없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은 허구가 아닐까?
Without noticing his amazing life, who can possibly say that she/he has a true faith?
The confession that Jesus was a true human and he is God only can be understood, based on what he said and did.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긍정이요 예수가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실 때에 그와 같을 것이라는 고백이다.
Claiming Jesus as the Son of God affirms that his earthly life was Godly and declaring Jesus as the Son of Man makes us imagine how God is with us in our suffering.
내 신앙의 경험으로는 그의 삶은 인간에 대한 긍정, 자유, 사랑이었다.
And then what his life was like I can say: it was full of acceptance, freedom, and love for humanity.
이 삶을 인정하는 것 없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신앙은 허구가 아닐까?
Without noticing his amazing life, who can possibly say that she/he has a true faith?
2011년 7월 9일 토요일
Who is God?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10711
사람들은 하나님을 은혜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 등으로 규정하며
그들의 믿음을 개진시킨다.
We Christians develop our faith
by defining God as merciful,
loving, just, and so on.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된다.
In fact, it is the start point of Christian faith
that we state who God is.
어쩌면 이것이 신앙이라는
자산에서 우리가 가진 전부일지
모른다.
Perhaps this is all we have
for our faith today.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하는
그 행위에서 신앙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Our faith begins and is completed
when we confess who God is for us.
정의의 하나님 등으로 규정하며
그들의 믿음을 개진시킨다.
We Christians develop our faith
by defining God as merciful,
loving, just, and so on.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된다.
In fact, it is the start point of Christian faith
that we state who God is.
어쩌면 이것이 신앙이라는
자산에서 우리가 가진 전부일지
모른다.
Perhaps this is all we have
for our faith today.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고백하는
그 행위에서 신앙이 시작되고
완성된다.
Our faith begins and is completed
when we confess who God is for us.
2011년 4월 5일 화요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기적 -월터 부르그만, A Demanding Long-Term Miracle”, by Walter Brueggmann
If you struggle with preaching the miracles in the Bible, it helps.
성서의 기적들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도움이 되는 설교 한 조각…
“A Demanding Long-Term Miracle”, by Walter Brueggmann
When we have our lives governed by “Yes, but,”
우리가 우리의 삶을 “가능합니다, 그러나”에 따라 살면,
by our proud capacity to control or our fearful need to control,
통제하는 우리의 오만한 능력이나 통제하기를 원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필요에 따라 살면
we resist God’s power for newness.
우리는 새로움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We deny God’s freedom to give gifts.
우리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이다.
We end the song, we stop the lyric,
우리는 노래하기를 그치고, 우리는 시를 멈추는 것이다.
we deny the truth of memory, and we only hold on grimly.
우리는 기억의 진실을 부인하고, 우리는 단지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이다.
Holding on grimly is an act of atheism,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governed by “Yes, but,”
“가능합니다, 그러나”에 지배되어
believing there is no more than what we can explain,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고 믿으면서
no more than what we can control, manage, and predict.
우리가 통제하고, 지배하고,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고 믿으면서
Those of us who gather around these texts and these powerful memories keep alive in our lives the terrible, unsettling transition between “Yes, but” and “Can you imagine?”
이 본문들과 이러한 강력한 기억들 주위로 모여드는 우리들은 “가능합니다, 그러나”와 “너는 상상할 수 있는냐?” 사이에서 최악의 동요하는 변화를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한다.
Most of the time, “Yes, but” wins.
대부분의 경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가 이긴다.
But by God’s powerful grace, the “Yes, but” of our resistance is broken.
그러나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에 의해서, 그 “가능합니다, 그러나”라는 우리의 저항이 중단된다.
Newness appears; we can sing songs, unembarrassed, songs about miracles.
새로움이 나타난다; 우리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자연스럽게, 기적에 대한 노래들을.
성서의 기적들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도움이 되는 설교 한 조각…
“A Demanding Long-Term Miracle”, by Walter Brueggmann
When we have our lives governed by “Yes, but,”
우리가 우리의 삶을 “가능합니다, 그러나”에 따라 살면,
by our proud capacity to control or our fearful need to control,
통제하는 우리의 오만한 능력이나 통제하기를 원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필요에 따라 살면
we resist God’s power for newness.
우리는 새로움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We deny God’s freedom to give gifts.
우리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이다.
We end the song, we stop the lyric,
우리는 노래하기를 그치고, 우리는 시를 멈추는 것이다.
we deny the truth of memory, and we only hold on grimly.
우리는 기억의 진실을 부인하고, 우리는 단지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이다.
Holding on grimly is an act of atheism,
완고하게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governed by “Yes, but,”
“가능합니다, 그러나”에 지배되어
believing there is no more than what we can explain,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고 믿으면서
no more than what we can control, manage, and predict.
우리가 통제하고, 지배하고, 예견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은 없다고 믿으면서
Those of us who gather around these texts and these powerful memories keep alive in our lives the terrible, unsettling transition between “Yes, but” and “Can you imagine?”
이 본문들과 이러한 강력한 기억들 주위로 모여드는 우리들은 “가능합니다, 그러나”와 “너는 상상할 수 있는냐?” 사이에서 최악의 동요하는 변화를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한다.
Most of the time, “Yes, but” wins.
대부분의 경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가 이긴다.
But by God’s powerful grace, the “Yes, but” of our resistance is broken.
그러나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에 의해서, 그 “가능합니다, 그러나”라는 우리의 저항이 중단된다.
Newness appears; we can sing songs, unembarrassed, songs about miracles.
새로움이 나타난다; 우리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자연스럽게, 기적에 대한 노래들을.
2011년 3월 30일 수요일
기도 Prayer
기도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며
Prayer is making one’s mind toward God,
기도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so prayer is not one’s action but a state of her/his mind.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부단한 노력 끝에 이르는 마음의 상태이다.
Prayer is one’s spirit found through endless try at learning and obeying God,
기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 일지라도
Although there might be many kinds of method to pray to God,
기도하는 이의 “마음 상태”는 한 가지이다: "열망과 평화의 공존”
in my opinion, there’s one state of mind: coexistence of longing and peace.
<참고 Note>
Before reading and criticizing my thought, you may understand that I’m learning.
이 글을 읽으시면서 신앙교리에 비교하여 비판하기보다 ‘이 사람이 아직도 배우는 중이구나’ 생각하시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rayer is making one’s mind toward God,
기도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so prayer is not one’s action but a state of her/his mind.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부단한 노력 끝에 이르는 마음의 상태이다.
Prayer is one’s spirit found through endless try at learning and obeying God,
기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 일지라도
Although there might be many kinds of method to pray to God,
기도하는 이의 “마음 상태”는 한 가지이다: "열망과 평화의 공존”
in my opinion, there’s one state of mind: coexistence of longing and peace.
<참고 Note>
Before reading and criticizing my thought, you may understand that I’m learning.
이 글을 읽으시면서 신앙교리에 비교하여 비판하기보다 ‘이 사람이 아직도 배우는 중이구나’ 생각하시고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1년 3월 7일 월요일
The matter of Resurrection is not the matter of fact.//////부활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부활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삶 속에서 고백하는 신앙의 문제다.
The matter of Resurrection is not the matter of fact. This matter is about our confession of the faith in our lif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유대적 신앙의 계승이며
The faith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is the succession of Jewish faith
그래서 구약 말기 수많은 유대의 의인들이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닌 것처럼
which enabled Jews to think that the death of God’s righteous people was not wothless, fighting for their independence in the closing years of Old Testament times.
그들과 같이 영원히 효력 있는, 삶을 위한 희생이라는 신앙고백이다.
So it is the confession that the crucifixion of Jesus was not worthlessly but both effectively and eternally taken for his people and again for us.
부활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이들의 희생과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소망 속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The faith in the Resurrection celebrates our life in which we pay cost to follow God’s righteousness.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진다고 할 때에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몸으로 살아나셨는가를 세상에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Therefore, having faith in resurrected Jesus is not about witnessing the feature of Jesus’ Resurrection.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 용감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Rather than that, this is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for every Christian: we should live every moment without fear of paying our cost for obeying God’s will as Jesus.
The matter of Resurrection is not the matter of fact. This matter is about our confession of the faith in our life.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유대적 신앙의 계승이며
The faith in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is the succession of Jewish faith
그래서 구약 말기 수많은 유대의 의인들이 헛되이 죽은 것이 아닌 것처럼
which enabled Jews to think that the death of God’s righteous people was not wothless, fighting for their independence in the closing years of Old Testament times.
그들과 같이 영원히 효력 있는, 삶을 위한 희생이라는 신앙고백이다.
So it is the confession that the crucifixion of Jesus was not worthlessly but both effectively and eternally taken for his people and again for us.
부활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이들의 희생과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소망 속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The faith in the Resurrection celebrates our life in which we pay cost to follow God’s righteousness.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진다고 할 때에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몸으로 살아나셨는가를 세상에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Therefore, having faith in resurrected Jesus is not about witnessing the feature of Jesus’ Resurrection.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 용감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Rather than that, this is th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for every Christian: we should live every moment without fear of paying our cost for obeying God’s will as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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