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겨자씨 교회 성도는 무엇을 믿는가?
본문 : 갈5장 16-26절
주제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의 욕심을 위하여 내 생각대로 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십자가의 삶을 산다.
흐름 : 현재 우리의 삶/우리 삶에서 생겨나는 물음들/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성경은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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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의 삶
지난 17일은 제헌절이었습니다. 외세에 의하여 하나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마침내 남한에서만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헌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고이승만 전 대통령에 의해서 1948년 7월 17일 오전 10시에 국회의사당에서 공포되었습니다. 반쪽의 나라였지만 38년간의 외세 통치를 받은 후에 우리의 나라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까? 거기에 더하여 외세에 간섭받지 않는 자주적 헌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공포하는 자리는 얼마나 더 기쁨이 넘치는 자리였겠습니까?
현재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위정자들의 오만한 행태를 볼 때에 나라의 귀중함과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조항이 참으로 뜻 깊게 느껴지는 때입니다. 국민의 소중함, 그래서 빈부귀천을 떠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믿는 위정자들과 대통령이 되기를 소원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촛불을 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국민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자리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 정직이 그 생활에 일상화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정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신다는 요셉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대통령을 위하여, 위정자들을 위하여, 촛불을 드는 국민들을 위하여,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부끄러운 일이 감리교회에서 발생했는데...그것은 감리교회의 수장이라고 할 감독회장께서 미수입 쇠고기와 대운하에 관계된 성명서를 감리교회의 이름으로 발표하신 것이 보수진영 교역자와 평신도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그것에 대한 사과를 발표하신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징계성으로 감독행정실장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감독회장을 모시기로 예정되어 있던 감리교 장로회의 집회에 그 계획을 취소하고 은퇴하신 김한옥 목사를 모셨다는 점입니다.
감리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영혼을 구원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교회입니다. 약자의 편을 들어주고 정당하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정신이 바로 우리 감리교회에 있습니다. 1997년에 감리회신앙고백이라는 것을 다시 만드는 것을 통해 감리교회의 이러한 진보적인 성향을 퇴색시키려 했으나 이미 이러한 정신은 우리 성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감리교회의 신앙을 잘 대변하는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1.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오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오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2.우리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3.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신을 믿으며
4.우리는 사랑과 기도의 생활을 믿으며 죄를 용서하심과 모든 요구에 넉넉하신 은혜를 믿으며
5.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으며
6.우리는 살아 계신 주 안에서 하나이 된 모든 사람들이 예배와 봉사를 목적하여 단결한 교회를 믿으며
7.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 됨을 믿으며
8.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아멘.
여러분 감리교회 성도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모든 혼탁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생겨나는 물음들
여러분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살고 계십니까?
텔레비전을 보거나 거리를 지나다니거나, 이웃의 삶을 보더라도 이 시대에는 참 쿨하고 멋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근사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돈 걱정하지 않는 든든한 직장이 있는 사람들이 참 행복해 보입니다. 거기다 본인을 포함하여 가족들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준다면 더 이상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최근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계층의 양극화가 심하다고 합니다. 중산층은 줄고 중산층에 속하던 이들이 빈민으로 쇠락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가정경제에 어려움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대통령을 뽑을 때에 그들의 정책을 꼼꼼히 따지고 살펴서 제대로 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투표를 제대로 한다면 이 나라는 건강한 지도자들을 세우게 되고 건강한 지도자들이 세워지면 그들이 정당한 정치, 국민 모두를 생각하는 정치를 하게 됩니다. 이후에 기회가 있을 때에 기도하시고 무조건 기독교인이라 해서 뽑아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전문가이고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 정직한 사람인가를 판단하여 뽑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경제계층의 양극화에 대한 사회적 대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가난할 수도 있고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어 모은 돈이라도 돈이 있으면 존경받고 없을 때에 무시당하는 사회풍토입니다. 이것을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정직한 돈이 아닐 때에 그것을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부요에 처할 줄도 안다고 하는 무엇이든 만족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구자원을 다 써버리더라도 세계는 지금보다 더 부자가 되어야 합니까? 고갈되어가는 자원의 대표적인 예가 석유자원인데 미국 텍사스 유전들이 이제 소형유전들이 되었고 앞으로 몇 십 년 안에 완전히 고갈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용하기까지 아주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는 석유자원들을 총동원하여 사용한다 해도, 극지방과 심해에 있는 석유들을 다 파헤친다 해도 100년 정도면 완전히 바닥난다고 합니다.
국민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더라도 우리나라는 더 부자가 되어야 합니까? 대운하를 통하여 국토가 오염되고 산천이 변하도록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 자손들에 결국은 자원도 없을 뿐 아니라 오염되어 머물기 어려운 땅을 물려주고만 싶은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신앙의 현 주소
이러한 질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사실 신학교 때에 설교를 가르치시는 복음주의 신학교의 교수님의 이야기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설교가 선포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들려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나 이제까지 저는 그렇게 설교하는 것은 상당히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인위적인 설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십자가의 거대한 복음을 매주 한 편의 설교 속에 주제와 상관없이 삽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설교하는 것은 제 마음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설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 속에 있었고 최대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제야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예배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경험한 후에, 그리고 그들이 의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안후에....설교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그 믿음을 실천하십니까? 놀랍게도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을 어떻게 부유하게 쿨하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갈까를 설교하는 교회들이 부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신들을 위한 마술적, 주술적 의미로만 사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마찬가지로 사용됩니다. 축복의 남발과 성령의 은사를 은혜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적 특기 능력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팽배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계십니까? 어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까?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고 계십니까?
성경은 이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는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5장 16-26절은 성도의 삶의 자세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욕심을 따르는 길과 대치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데 그것은 그 둘이 완전히 반대 방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만 산다면 그는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며 말씀이 내게 다가올 때에 감동하심이 있을 때에 그것이 옳게 믿어진다면 그것을 따르는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18절,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율법을 언급한 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꼭 지켜야 할 불문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정직하게 지켜 행하려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인간의 연약함이 항상 정죄 당하게 하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하여 경험하였습니다. 율법을 적용하면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의인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죄로 인하여 가책 받고 고통 받으며 죄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19-21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욕심, 자기만을 위한 욕망을 가진 이들이 행하는 일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성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도 이러한 일들을 행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의 의지가 약하여 한두 번, 혹 몇 번에 걸쳐 같은 죄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즉각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고의적으로 자신이 그 부분에 약한 것을 알면서도 자기를 그 욕망에 방치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에 모신 사람이라면, 그래서 성령이 내주하시는 사람이라면 그런 고의적인 범죄를 지속할 수 없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하신 말씀은 그 당사자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돌이켜 돌아올 때에 해당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육체의 일에서 자유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실천하게 합니다.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평화의 삶이 되게 합니다. 오래 참는 인내를 주십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선을 추구하게 합니다. 충성된 사람이 되고 온유하게 합니다. 절제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부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어떤 수단과 방법이든 높아지려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나 24절의 말씀처럼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밖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 맺기를 소원하고 그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5-26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저와 여러분의 사는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우리는 단 5분도 허락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길어도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가끔 안타깝게 듣는 소식은 어느 중년의 부인이 자신이 이룩한 경제적 부를 누리지 못하고 아깝게 난봉꾼 남편에게 다 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수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친히 모범을 보이시며, 결국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신의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며, 이 믿음을 통하여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변화시키고 천국의 주인공으로 살아갑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던 세상을 일찍 떠난 중년부인의 경우에 자신이 돈에 매달리는 그 목표를 하나님에게 두었더라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남편에게도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아니 하나님의 능력의 팔에 자신을 맡겼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순간순간 우리는 수많은 선택에 직면해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선택을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욕심, 욕망을 따라가는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 것이냐를 지금 이 순간 결심하고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하게도 나는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선택을 하고 있는가를 오늘 이 시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겨자씨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가 육체의 고난까지도 무릎쓰는 순종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후기도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믿는 그 믿음하나로 옳다함 얻은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의 삶에서 어떤 기적이나 복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하의 본을 받는 삶이 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옵소서. 우리는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할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독교대한감리회 겨자씨교회
서울시 양천구 신월1동 238-9 2층 02) 2693-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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